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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베테랑, 동네변호사 조들호 그리고 송곳

중앙일보 2016.05.26 00:23 종합 30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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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갑생
피플&섹션부장

“어이가 없네”를 연발하며 온갖 악행과 갑질을 일삼는 재벌 2세 조태오(유아인). 건들면 다친다는 충고와 압력에도 포기하지 않는 베테랑 형사 서도철(황정민). 지난해 여름 개봉해 관객 1340만 명을 동원한 영화 ‘베테랑’ 얘기다. 엄청난 돈과 ‘빽’을 이용해 집요하게 방해 공작을 펼치고, 심지어 살인 교사까지 하는 조태오 측 행위는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서도철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기어코 조태오를 잡고야 마는 광역수사대의 활약은 속 시원했다. 명확한 ‘권선징악’ 구도 덕분에 역대 국내 영화 흥행 순위 3위까지 올랐다.

지난 3월 말 시작한 KBS 2TV의 ‘동네 변호사 조들호’도 비슷하다. 고아원 출신에 검정고시를 거쳐 사법시험에 합격한, 줄도 빽도 없는 검사 조들호(박신양). 윗선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다 오히려 누명을 쓰고 감옥 생활을 한다. 이후 노숙자 생활을 전전하다 약자들의 억울한 사연을 접하고는 동네 변호사로 변신한다. 그는 정의감과 빼어난 기지를 앞세워 악덕 재벌, 돈만 밝히는 유치원장 등을 통쾌하게 혼내준다. 인기 웹툰 원작의 이 드라마는 시청률 15%로 같은 시간대의 경쟁 드라마들을 압도하고 있다.

베테랑, 조들호를 생각하면서 떠오른 드라마가 있다. 지난해 10~11월 JTBC에서 방영한 12부작 드라마 ‘송곳’이다. 인기 웹툰을 거의 그대로 드라마로 옮겨 온 작품이다. 외국계 대형마트에서 벌어지는 부당 노동행위와 노조를 조직해 힘겹게 맞서는 상황을 그려냈다. 첫 회는 시청률 2%를 넘었다. 구성이 탄탄하고 등장인물의 싱크로율(원작 웹툰과의 일치 정도)이 놀랍다는 호평도 받았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마지막까지 시청률 2%를 다시는 넘지 못했다. 매니어층은 생겨났지만 일반 시청자들은 외면했다. 왜 그랬을까. 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의 말에 답이 있다. “보기 드물게 잘 만든 드라마다. 하지만 너무 사실적이어서 보는 내내 답답했다.” 사측이 부당한 탄압을 가해도 제대로 반격하지 못하고 상황은 더 꼬여만 가는 장면들이 계속되는 걸 지칭한 것이다.

아마도 서도철이나 조들호였다면 통쾌하게 응징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서도철, 조들호처럼 약자 편에서 강자를 혼내주는 그런 ‘영웅’은 좀처럼 존재하기 힘들다. 그래서 시민들은 한껏 과장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1980년대 사회 복수극의 원조인 ‘인간시장’의 ‘장총찬’을 탄생시킨 소설가 김홍신씨는 최근 이런 말을 했다. “시대가 엄혹했으니까. 사람들의 울분을 대신 해소해 줄 존재가 필요했는데 그게 장총찬이었다. 인간시장 같은 소설이 읽히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다. 진심으로 이런 책이 읽히지 않는 시대가 빨리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처럼 베테랑, 조들호를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시대가 더 이상 아니었으면 한다. 쉽지 않지만 그런 시대를 만드는 게 우리의 숙제이지 싶다.

강갑생 피플&섹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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