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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방을 명주로 키운 건 1년 300일 흐린 날

중앙일보 2016.05.26 00:01 경제 6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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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부들이 모래처럼 발효된 술을 찌고 있다. 찜통의 술을 증류하면 수정방 원액을 얻을 수 있다. 증류 후 남은 술지게미는 다시 흙구덩이로 들어간다. [사진 디아지오]


술병을 열면 새콤 달콤한 향이 코 끝에 번진다. 들이키면 불덩이를 삼킨 듯 위까지 화끈거려오지만, 곧 거짓말처럼 잠잠해진다. 복잡하지만 간결하고, 묵직하지만 무겁진 않다. 마오타이(茅臺), 우량예(五粮液)와 함께 중국의 3대 명주로 꼽히는 ‘수정방(水井坊)’은 모순된 맛을 자랑한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는 “목 걸림과 잔기술이 없고, 맛이 깨끗하며 정제됐다. 중국 역사가 빚고 여과한 술”이라고 평가한다.

600년 전 끊긴 명맥 20세기 말 복원
전통 방식으로 장인 1600명이 생산
디아지오서 인수한 뒤 세계화 나서


중국 쓰촨(四川)성 청두(成都). 후한 시대 유비가 촉한(蜀漢)의 수도를 세운 곳으로, 중국 제일의 바이주(白酒·곡물로 밑술을 빚거나 발효해 만든 중국 전통 증류주) 생산지다. 365일 중 300일은 날이 흐리고 습도가 높아 효모가 번식하기 좋다. 물도 깨끗해 좋은 술을 만들기엔 천혜의 조건이다. 우량예 역시 쓰촨 태생이다.

지난 20일 찾아간 청두의 수정방 박물관. 입구에서부터 진한 고린내가 번졌다. 바이주는 향에 따라 크게 농(濃)향(곡물의 단 향이 강한 술)과 장(醬)향(누룩의 향이 강한 술)으로 분류된다.

수정방은 농향의 대표적인 술이다. 냄새가 고약한 덩어리 치즈를 작게 자르면 고소한 향이 나듯, 수정방을 잔·병으로 나누면 향이 새콤해진다. 수정방은 원나라 이후로 명맥이 끊겼다. 그러다 1998년 대규모 원나라 양조장 유적이 발굴되면서 다시 볕을 보게 됐다. 다행히 당시 유적에서 효모가 살아있는 채로 발견됐고, 이를 배양해 과거 양조법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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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무원은 600년 만에 발견된 이곳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문화재보호구역)’로 지정했고, 2013년 이곳에 현재의 박물관을 세웠다. 수정방박물관과 청두 인근 두 곳 양조장에선 1600여 명의 장인이 옛날 방식 그대로 수작업으로 술을 만들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인부들은 끊임없이 땅을 파고 묻고를 반복했다. 가지런히 정렬된 구덩이를 파내 술을 꺼내고, 다시 술지게미를 묻는다. 수정방 맛의 비밀은 숙성에 있다. 쓰촨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수수(36%)와 쌀(22%)·찹쌀(18%)·밀(16%)·옥수수(8%)·엿기름을 섞은 원료를 술지게미와 함께 쪄낸 후 1.5m 깊이의 흙구덩이에 파묻는다. 원료는 땅속에서 자연 발효돼 90일이 지나면 모래 형태의 술이 된다.

이를 다시 쪄 증류하면 액체 술이 된다. 증류하고 남은 술지게미는 다시 새 곡물과 함께 쪄 흙구덩이에 파묻는다. 술지게미가 묻힌 깊이와 흙 무덤의 온도와 습도에 따라 맛은 달라진다. 구덩이의 가장 아래 있는 술일 수록 맛이 좋고, 알코올 도수가 높으며, 가격도 비싸다. 처음 생산된 술은 63~64도로 농도가 짙은데 이를 4~5년간 숙성해, 각기 다른 도수의 원액을 혼합하면 수정방이 완성된다.

수정방은 흙구덩이에서 90일마다 술을 파내기 때문에 와인처럼 몇 년 산인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눈으로 투명도와 점도를 살피고, 잔을 기울여 향을 음미하며 마시는 법은 와인과 비슷하다. 바이주는 오래 숙성할수록 맛과 향이 진하고 도수가 높다. 중국에선 30도 이상 만을 바이주로 인정한다. 마오타이 등 장향 술은 최고 도수가 53도 내외, 수정방 등 농향 술은 최고 도수가 61도 내외다. 마오타이는 단 맛과 감칠 맛이 매력이라면, 수정방은 깨끗한 맛과 향이 일품이다.

수정방은 중국을 대표하는 술이지만 주인은 세계 최대 주류회사인 디아지오다. 디아지오는 수정방의 가치를 높게 봐 2005년부터 인수 작업에 들어가 2013년에야 간신히 인수를 마쳤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바이주를 외국 회사에 함부로 넘길 수 없다는 중국 내 여론이 만만찮아 디아지오나 중국 당국도 인수·합병(M&A)에 조심스러웠다. 디아지오는 수정방을 인수한 뒤에도 전통 제조 방식을 존중해왔다. 덕분에 중국서 지난해 9억 위안(약 1630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순항 중이다.

디아지오는 수정방을 앞으로 멕시코의 데킬라나 일본의 사케처럼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우겠다는 계획이다. 댄 해밀튼 디아지오 중국 증류주 사업부문 대표는 “수정방은 전통적 가치와 모던한 감각을 모두 겸비했다”며 “중국의 장인 정신과 예술성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로 삼고 싶다”고 밝혔다. 디아지오는 지난해 뉴욕에 최초로 바이주를 칵테일로 판매하는 바를 열었고, 영국에서도 시음행사를 했다.

청두(중국)=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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