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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여성들 “나도 당할 수 있다…어떻게 여성혐오 아니냐”

중앙일보 2016.05.23 02:14 종합 5면 지면보기

부산·대구까지 추모 물결 확산

| “언제까지 여자만 조심해야 하나”
피해자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 표출
인터넷·SNS서‘김치녀’‘성괴’난무
여성 83%가 “비하표현 경험했다”
일각선 “남녀 대결로 번져선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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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앙로역 대구시 중구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 2번 출구 부근에 22일 ‘강남역 살인사건’의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조화가 놓여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22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김지양(29·여)씨는 “여성 혐오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여성이 폭력에 노출돼 있고 사회가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크다”고 말했다. 대규모 추모 공간이 된 이곳에서 만난 20·30대 여성들은 경찰이 강남역 살인사건을 여성 혐오 범죄가 아니라 조현병 환자에 의한 개인 범행이라고 발표한 데 대해 “어떻게 개인의 문제로 볼 수 있느냐”며 항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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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서면 부산시 부산진구 서면의 ‘젊음의 거리’에서 22일 시민들이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메모를 하트 모양의 조형물에 붙이고 있다. [사진 송봉근 기자]


이곳뿐 아니다. 부산 젊음의 거리, 대구 중앙로역, 대전 시청역 등에서도 ‘나는 오늘도 우연히 살아남았다’ ‘언제까지 여자가 조심해야 하는가’ 등의 메모지 수천 장이 나붙었다.

특히 경찰 조사 결과 살인 피의자 김씨가 화장실에서 마주친 남성 6명을 모두 보내고 여성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여론이 촉발됐다. 이 때문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트위터에서 ‘강남역 살인사건 공론화(@0517am1)’라는 이름의 계정이 개설돼 이번 사건을 여성 혐오 범죄로 규정하기도 했다.

김규원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런 현상에 대해 “누구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위기감과 함께 피해자를 지켜주지 못한 데 대한 죄책감이 표출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사회는 개인주의화됐으나 이런 가운데 유대감(공감) 코드가 작동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나타난 여성의 집단적인 의사 표출은 과거와는 차이가 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수많은 여성이 희생된 유영철 사건도 여성 혐오의 발현이지만 이번처럼 큰 반향은 없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내 딸이나 내 동생도 당할 수 있다는 데 대해 남성도 분노를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강남역 추모 공간에 나온 허민(28·남)씨도 “경찰의 발표는 단지 법 집행을 위한 분석일 뿐”이라며 “젠더(gender·성)의 문제, 사회적 문제가 됐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여성으로서 평소 겪은 공포감과 불안의식이 왜 이번에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을까. 이에 대해 “여성 혐오 문제와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는 의견이 있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는 “단순히 한 사건이라고 하기에는 엄청난 파급력을 보인다. 우리 사회에 여성 혐오가 만연해 있고 여성들에게 위협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강남역 사건은 그 ‘결과’이거나 문제를 더욱 증폭시킨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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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여성 대다수는 여성 혐오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해 10월 여성 3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83%가 인터넷·SNS에서 ‘김치녀’(한국 여성을 비하적으로 일컫는 말), ‘성괴’(성형한 여성), ‘삼일한’(여성은 3일에 한 번 때려야 한다) 등의 여성 혐오 표현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여성 절반 이상(58.3%)은 앞으로 여성 혐오가 더 심해질 것이라고 예상했고, 혐오가 약화될 것이란 응답은 8.7%에 불과했다.

장미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여성권익·안전연구실장은 “우리 사회에서 일상화된 여성 혐오의 대상이 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위험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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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에 대한 반감 표출은 온·오프라인에서 또 다른 반발을 몰고 오고 있다. 지난 20일 강남역 추모 현장에는 핑크색 코끼리 인형 옷을 입은 사람이 “육식동물이 나쁜 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는 동물이 나쁜 것”이라는 문구가 적힌 화이트보드를 들고 등장했다. 피해 여성을 추모하던 시민들은 “의상과 문구가 적절치 않다”고 항의했다. 이어 코끼리 옷을 입은 사람을 두고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앞서 19일 일베 회원들은 강남역 현장에 ‘남자라서 죽은 천안함 용사들을 잊지 맙시다’라는 문구가 들어간 화환을 보내 논란이 일었다. “한 범죄자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온 남성을 모욕하지 말라”는 주장이 SNS에서 퍼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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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을 계기로 여성 혐오 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범죄가 일어난 남녀 공용 화장실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새누리당 심재철 의원은 이날 “남녀 공중화장실을 의무적으로 분리시키는 내용의 공중화장실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일명 ‘강남역 묻지마 살인 방지법’)을 20대 국회 1호 법안으로 발의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이 성 대결의 구도로 번지는 데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는 “차별은 남성과 여성 모두의 문제이며,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의식을 가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수연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남녀 간의 대립으로 몰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온·오프라인에서 비합리적인 혐오와 차별을 없애는 계기로 삼자”고 했다.

남윤서·정진우 기자 대구·대전·부산=홍권삼·김방현·강승우 기자 nam.yoonseo1@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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