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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라의 아이슬란드 오디세이] <17> 자연의 깊은 품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중앙일보 2016.05.23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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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폭우가 몰아쳤다. 새벽 내내 바람에 삐걱거리던 나무 울타리 대문 소리에 잠을 설쳤다. 눈 밑에 검은 주머니를 길게 달고선 하루를 시작했다. 부슬비가 내리는 오늘의 목적지는 피야드라글리유푸르(Fjaðrárgljúfur)라는 협곡이었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 협곡은 키르큐바이야르클뢰스투르(kirkjubæjarklaustur)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의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링로드에서 살짝 벗어나 206번 비포장도로를 타고 약 2㎞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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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터에 차를 세울 때만 해도 나는 무심했다. 아이슬란드를 한 바퀴 도는 동안 크고 작은 협곡을 무수히 보았고 수없이 감탄했다. 그래서 협곡이 다 같은 협곡이겠거니 했다. 차에서 내리자 산속 깊숙한 곳에서나 느껴질 법한 서늘한 공기가 맨살에 닿았다. 왼편에는 라바 필드(Lava Field)가 광활하게 뻗어있고 오른쪽에는 거대한 언덕이 솟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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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곡 입구에 도달한 나는 예상과는 다른 협곡의 모습에 다리가 풀리고 말았다. 양옆으로 펼쳐진 각양각색의 기암절벽은 길고 깊은 통로를 이루고 있었다. 그 사이로는 강이 구불구불하게 흐르고 있었는데, 그 형상이 마치 거대한 구렁이가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듯했다. 협곡의 내부는 나무 한 그루 없었지만 숲처럼 푸르고 정글처럼 울창했다. 굴곡이 심해 어디가 끝인지 보이지 않았지만, 한없이 깊은 것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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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에 강물이 제법 불은 탓에 협곡의 안을 걷는 것은 무리였다. 언덕 위로 나 있는 트레일을 따라 올라가기로 했다. 누런빛의 잡초로 가득한 길은 절벽에 가까워질수록 밑에서 보았던 진한 녹색으로 변모했다. 그 색이 어찌나 밝은지 눈이 멀 지경이었다. 절벽 끝에 다다르자 두 발아래 협곡의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피야드라글리유푸르 협곡은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무렵,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9000년 전에 형성되었다. 빙하에서 녹아내린 물은 이곳으로 흘러들어 200만 년 동안 축적된 땅을 깎아내렸고, 그 결과 깊이 약 100m, 길이 약 2km에 이르는 협곡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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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협곡의 경사면은 어딜 둘러보아도 같은 모양으로 조각된 것이 없었다. 어떤 것은 코끼리 상아처럼 빼죽하고, 다른 것은 주걱처럼 둥글었다. 황소의 허벅다리처럼 넓적하거나, 가운데 구멍이 뻥 뚫린 아치 모양도 보였다. 수십 세기 전 이곳을 흐른 물결이 얼마나 세차면서도 우아했는지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짙은 고동색의 팔라고나이트 암석 위에는 이끼와 풀이 가득 자라 있었다. 물기를 한껏 머금어 촉촉하게 빛났다. 아마존 열대우림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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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레일을 따라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가면 갈수록 지형은 험준해지고 색은 멀미가 날 만큼 화려해졌다. 길의 끝에 도마뱀의 머리를 쏙 빼닮은 암석이 허공으로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폭이 2m가 채 안 돼 보였다. 다리가 미친 듯이 후들거렸다. 바닥만 보고 겨우겨우 걸어 암석의 끄트머리로 걸어갔다. 여전히 다리는 어정쩡하게 구부린 채 반쯤 감았던 눈을 겨우 떴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대자연의 경이로움에 꼼짝없이 갇혔다. 장엄함과 두려움에 조금도 발을 떼기가 힘들었다. 그저 고개를 돌려 시선을 이리저리 던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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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앞에서는 하얀 폭포가 바위틈 사이로 쏟아져 내렸고, 밑으로는 강줄기가 까마득한 협곡을 타고 흘렀다. 등 뒤에는 또 다른 세상인 듯 뻗어있는 벌판이, 머리 위에는 운무가 가득했다. 나는 그야말로 자연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수많은 감정이 몸통을 관통했다. 그러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시간과 자연이 빚어낸 광경 앞에 나는 한없이 작고 무지했다. 이내 입을 다물고 생각을 멈췄다. 그리곤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자연의 품 안에 그저 꼭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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