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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모르고 살았다, 60여 년 아코디언에 미칠 수 있었다”

중앙일보 2016.05.21 00:34 종합 16면 지면보기

사람 속으로 팔순 ‘대통령의 악사’ 심성락

| 박정희·전두환·노태우 행사 때 연주
가수 10명 중 9명 노래 반주 도맡아
연주곡 7000곡, 음반 1000장 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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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성락은 네 손가락 운지법을 쓴다. 어릴 적 오른쪽 새끼손가락 일부가 잘렸다. 장애를 딛고 그만의 연주법을 만들었고 최정상에 올랐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화마가 노악사(老樂士)의 품 안에서 35년간 숨 쉬어 온 악기를 집어삼키는 데 수분이 걸리지 않았다. 지난달 11일 자정 무렵 시뻘건 불이 방 안에서 번져갈 때 그의 머릿속은 온통 ‘이웃 사람들’ 생각뿐이었다. ‘옆집 아저씨! 윗집 할머니!’ 정신 없이 집 밖으로 뛰어나가 옆집 문을 두드렸고 내의 바람으로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불이야. 불났어요. 소방서에 연락해주세요. 할머니를 구해주세요.”

소방차는 금세 왔고 불은 번지지 않았다. 발화 장소인 서울 군자동 단칸방만 전소했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아코디어니스트 심성락(80)은 아코디언을 잃었다.

“말하기가 참 창피해요. 마른 재떨이에 둔 담뱃불이 그리 됐으니…. 내가 미친 사람이야. 60년 넘게 음악 했으면서 악기 가지고 나올 생각을 못했어. 믿어지지가 않아요. 내 자식이 그랬다면 당장에라도 ‘야 이 미친놈아. 어째 악기 갖고 나올 시간이 없었냐’라고 버럭 소리쳤을 텐데….”

18일 서울 서소문 중앙일보에서 만난 그는 자꾸 자책했고, 회한에 잠겼다. 문 앞에 두고 나온 무게 30㎏의 아코디언. 이탈리아산 ‘수퍼 파올로 소프라니(5열식)’. 젊었을 때는 서서 켜기도 했지만 이제는 앉아야만 그 무게를 겨우 감당할 수 있던 그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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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가 일어나기 전, 무대 위에서 연주하고 있는 심성락.


바람이 들어오면 숨을 들이쉬고, 바람이 나가면 숨을 내쉬는 주름상자의 가락에 취해 산 심성락의 여든 인생은 그 자체가 한국 대중음악사다. 조용필·이미자·이승철·신승훈 등 국내 가수 열 중 아홉의 노래 반주를 도맡아 했다. ‘봄날은 간다’ ‘효자동 이발사’ 등 다수의 영화 OST 작업에 참여했다. 한국음악실연자연합회에 등록된 연주곡만 7000여 곡, 음반은 1000여 장에 달한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이 주재한 행사에 오르간 연주를 해 ‘대통령의 악사’로 불렸다.

마침 지난달 30일 서울 이화여대 삼성홀에서 열린 ‘라잇 나우 뮤직(Right Now Music)’ 무대를 앞둔 터였다. 공연을 총괄한 페이퍼레코드 최성철 대표는 심성락을 위해 부랴부랴 비슷한 악기를 공수했다. 공연이 끝난 후 가요계 인사들과 앞장서서 노악사가 새 악기를 살 수 있게 소셜펀딩에 나섰다. 1980년대 초 구입 당시 약 330만원이었던 악기는 지금 2500만원에 달한다. 소식을 접한 심성락은 처음에는 울었다. 이윽고 면구스럽다고 했다.

“남의 일에 끌어들여서 미안해요. (함께 온 최 대표를 보며) 이 양반한테 신세 지고 여러 사람한테 신세 지는 게 달갑지만은 않아요. 평생 신세 안 지고 살려 했는데….”

이날 심성락은 인터뷰 시간보다 1시간30분 일찍 도착했다. 평소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하는데, 이날은 차가 막히지 않아 그리 됐다고 했다. 다리가 불편한데도 사진 촬영이 끝나고 바닥에 떨어진 검은색 천을 손수 주워 정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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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펀딩으로 새로 구입할 아코디언은 예전 악기와 같은 모델(左), 불에 탄 그의 이탈리아산 아코디언(右). [사진 페이퍼레코드]


심성락의 악사 인생은 51년 부산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전후 국내 음악인들이 모두 부산에 몰려 있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그는 드나들던 악기점에서 우연히 아코디언을 접하게 됐다. 악기점의 갈해준 사장은 마침 부산KBS 노래자랑의 심사위원이었다. 그의 솜씨를 눈여겨본 갈 사장의 추천으로 대회에서 아코디언 반주를 맡게 됐다. 또 다른 심사위원이었던 한복남 도미도레코드사 사장이 심성락(본명 심임섭)이라는 예명을 지어줬다. ‘소리로 여러 사람을 즐겁게 해주라’는 이름대로 반세기 넘게 살았다.

| 오른손 새끼 손가락 어릴 적 절단
“네 손가락 연주법 정식 아니라 틀려”


심성락의 오른쪽 새끼손가락은 어릴 적 사고로 일부 절단됐다. 그래서 그는 네 손가락으로 건반을 짚는다. 수없이 연습해 그만의 운지법(運指法)을 터득했다. 장애를 딛고 정상에 섰음에도 노악사는 자꾸 “틀려먹은 일”이라고 말했다.

“내 운지법은 틀린 거예요. 원래 운지법을 벗어났으니까요. 콩쿠르 대회라도 나가면 영락없이 떨어지겠죠. 정식이 아니니까.”

그는 거의 모든 가요를 외운다. 그래서 악보를 안 본다. 악보는 그린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서다. 남이 써놓은 것을 그대로 따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온 정신을 노랫가락 속에 파 집어넣은 채 아코디언을 연주한다.

지난 세월 동안 돈도 많이 벌었지만 모으지 않았다. “돈을 모르고 살아서 음악에 미칠 수 있었다”고 했다. “변명 같은 이야기지만 쩨쩨하게 살지 않았다”고도 했다.

심성락은 2009년 앨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냈고 이듬해 한국대중음악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시상식의 헌정공연 주인공으로 무대 중앙에 섰다. 늘 무대 뒤 또는 녹음실에서만 있던 그였다.

“혹자는 나보고 음지에서만 일한다 그러는데 나는 반대라고 그랬어요. 녹음실이 양지고 무대가 음지요. 무대에서는 하다가 틀리면 거기서 끝나지 않나요. 최선을 다하는 그 자리가 양지지요. 녹음실에서 일하는 게 가장 행복했어요. 우리나라 최고의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한다는 게 행복했어요.”

| 단칸방 불나 35년 된 아코디언 잃어
가요계서 악기 살 수 있게 소셜펀딩
“평생 신세 안 지고 살려고 했는데…”


인터뷰가 끝나고 엘리베이터 앞에 선 심성락. 지팡이를 짚은 노악사가 갑자기 최 대표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 괜히 나 때문에 번잡해지지 않았나. 괜히 이 일에 끼게 되어 후회하지.”

“선생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응당 해야 할 일인데요.”(최 대표)

(물끄러미 응시하다) “나 때문에 고생이오.”

소셜펀딩은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텀블벅( tumblbug.com/shimsungrak)에서 참여할 수 있다. 모금으로 사게 될 새 아코디언의 악기 벨트에 후원자의 이름을 새겨 넣을 계획이다. 감사 친필 메시지 카드, 한정판 LP 등 선물도 마련했다. 후원자를 위한 공연도 7월 14일 연다.
 
[S BOX] JP 오르간 교습선생…박정희 ‘짝사랑’ 노래 반주 계기로 ‘대통령 악사’ 돼

심성락은 1970년 색소폰 연주자 이봉조(1931~87)의 소개로 김종필 총리의 전자오르간 교습선생이 됐다. 그는 그해 서울 삼청동 총리 공관에서 열린 김 총리 생일연회에 오르간 반주자로 참석했다. 당시 시화호 시찰로 연회에 참석 못한다는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나타났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참석자들이 대통령에게 노래를 권유했다. 악단 앞으로 나온 대통령이 한마디 했다. “내 ‘짝사랑’ 할게.” 가수 고복수의 노래로, 박 대통령의 애창곡이었다. 첫 음을 어떤 키로 잡아야 할지 악단이 우왕좌왕했다. 너무 높지 않고 낮지 않은 음으로 부르는 사람이 편한 키를 빨리 찾는 게 실력 있는 악단의 요건이었다. 그 사이 대통령이 한마디 더 했다. “F마이너로 하자.” 너무 저음이라 걱정했는데, 대통령의 목소리가 워낙 저음이라 키가 딱 맞았다.

몇 개월 후 청와대에서 연락이 다시 왔다. “각하가 좋아하는 경음악을 녹음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20여 곡을 녹음해 보냈다. 이후 전두환·노태우 등 세 명의 대통령과 인연을 맺고 ‘대통령의 악사’가 됐다. 주로 청와대 공식행사에 참석해 오르간 반주를 했다. 그는 “청와대에 아코디언을 갖고 들어갈 수 없어 있는 악기로 연주해야 했다”고 전했다.

글=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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