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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의 길!] 경주와의 기막힌 인연

중앙일보 2016.05.21 00:01 종합 25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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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

저지르고 본 세계시민학교
10년 만에 학생 수 1만 배
70억 모두 지구집 한 식구
같은 운명의 세계시민이다

세계시민학교 교장

그때도 덩굴장미가 예쁘게 피고 벚나무에 빨간 버찌가 앙증맞게 달려 있던 5월 말이었다. 경주 출장길에 동료들과 숙소 근처를 산책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한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따당! 갑자기 번개를 맞은 듯 온몸에 강렬한 전율이 일면서 머리와 가슴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그래, 눈 딱 감고 일단 저질러보는 거야!”

10년 전 이름 거창하고 뜻은 더 거창한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이 생각은 2005년 파키스탄 긴급구호를 다녀온 직후에 시작되었다. 현장에서 돌아오자마자 TV 모금 방송에 나가 도움을 호소했다. 고맙게도 한밤중에 몇 억원이 걷혔다. 방송 중 전화가 밀려 번호만 받아 놓고 다음날 다시 연락을 했는데 글쎄 하룻밤 사이에 마음이 변한 사람이 많았다. 몇 만원이 몇 천원으로, 아예 후원 자체를 철회하기도 했다.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혹시 우리가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해서 모금을 했던 건 아닌가 싶어서다. 재난을 당한 사람들도 ‘지구집’에서 함께 사는 ‘우리 식구’니까 돕는다는 교육의 결과였다면 크게 달랐겠지?

그러나 당장 사람 살려낼 돈과 인력도 부족한데 ‘한가하게’ 세계시민교육 얘기를 하기가 어려웠다. 세계시민학교를 시작하겠다면 그게 될 것 같으냐, 괜히 힘 빼지 말고 하던 일이나 잘하라는 충고를 사방에서 들었다. 하지만 꼭 하고 싶었다. 단체 내에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1년 이상 틈만 나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날 아침, 마침내 ‘경주 결의’를 하게 된 거다. 뭐가 되든 일단 시작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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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시민교육! 이름은 거창해도 내용은 간단하다. 세계화 시대에 사는 우리는 지구촌이라는 말을 흔히 한다. 그러나 교통·통신의 발전, 특히 스마트폰 등장으로 클릭 한 번이면 세상일을 실시간으로 샅샅이 알 수 있으니 지구촌보다는 지구집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이리 보면 70억 인구는 5대양 6대륙이라는 지구집에 사는 한 집 식구인 셈이다. 6층짜리(6대륙이니까) 우리 집은 전체가 투명 유리로 되어 있고 방음이 전혀 되지 않아 층간 소음이 매우 심하다. 이 때문에 위층·아래층에 사는 사람들이 뭘 하는지 훤히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층에서 생기는 크고 작은 일들이 내 일상에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다.

위층 시리아 방에서 싸움이 나 유리창이 깨지면 거기서 들어오는 찬바람이 내 방까지 들이닥친다. 아래층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 방에 퍼진 에볼라가 내 방까지 오는 건 시간문제다. 네팔 방에서 지진이 났을 때 돕는 것은 우리가 돈이 많거나 도덕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라 그들도 지구집에 함께 사는 우리 식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을 나는 세계시민이라고 부른다. 나와 전 세계가 촘촘하게 연결된 운명공동체라는 의식을 가진 사람. 그리하여 세계 문제에 관심을 갖고 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기꺼이 하는 사람들 말이다.

물론 세계시민교육은 혼자서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국제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유엔 교육문화기관인 유네스코가 세계 공동체를 위한 교육으로 시작했고 우리나라에서도 국제구호개발 단체를 비롯한 인권, 환경, 시민사회 등 많은 단체가 여러 형태의 세계시민교육을 하고 있다.

2007년 ‘지도 밖 행군단’이라는 이름으로 제1기 졸업생 50명을 배출하기 시작해 작년 한 해에만 우리 학교 교육을 받은 학생 수가 무려 51만 명이다. 불과 10년 만에 학생수가 1만 배가 넘었으니 힘이 절로 솟으며 신날 수밖에. 그래서 월드비전 24명의 담당 직원과 800여 명의 세계시민학교 강사들은 험한 자갈길을 함께 걷고 있는 거다. 힘들지만 재미있게 그리고 의미 있게.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던가? 세계시민의식 확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생겼다. 제66차 유엔 NGO 콘퍼런스가 5월 30일부터 6월 1일까지 한국에서 열리게 된 거다. 유엔 역사와 함께해온 이 행사는 전 세계 시민사회 영역을 대표하는 가장 권위 있는 회의다. 놀랍게도 올해의 주제는 ‘세계시민교육’이고 그 회의 장소는 10년 전 내가 이 일을 하기로 결심한 경주다.

이번 회의에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및 전 세계 시민사회단체에서 2000여 명이 참석해 ‘유엔 지속 가능한 개발 목표 이행을 위한 협력’이라는 부제 아래 세계시민교육에 대해 토론하고 합의를 도출하게 된다. 그를 바탕으로 ‘경주선언문’도 발표할 예정이다.

이런 의미 있는 행사의 홍보대사가 누구겠는가? 경주의 봄기운을 받아 세계시민학교를 열었던 바로 나다. 학기 중이라 초를 쪼개 써도 모자랄 만큼 정신없지만 홍보대사 제안이 왔을 때 흔쾌히 응했다. 바쁘다고 마다할 일이 아니다. 세계시민학교 교장이니까.

다음 주말, 이 행사를 하러 경주에 간다. 10년 전 예뻤던 빨간 장미와 버찌는 여전할까? 내 마음이 이렇게 두근거리는 건 꽃구경 때문만은 아닐 거다.

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세계시민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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