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문혁 당시 나이는.
- “톈진(天津) 제18중학 3학년이었다. 그로부터 3년간 모든 학교가 문을 닫고 신입생 모집이 중단됐다. 그 바람에 상급학교 진학을 못한 66∼68년 졸업생을 라오산제(老三屆)라 부른다. 대학에 들어가려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대신 혁명조직에 들어가 홍위병이 됐다.”
- 어떤 활동을 했나.
- “매일같이 군중 집회에 나가는 게 일이었다. 어느 일요일 텐진 당서기를 끌고 나와 ‘피더우’(批斗·비판투쟁)를 했다. 그는 하루 이틀 뒤 숨졌다. 홍위병 중에는 선생님이나 부모까지 비판대에 세우고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은 걸 지금도 다행으로 생각한다. 친구 중에 선생님을 가혹하게 때리고 모욕을 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일로 마음 고생을 하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해 8월 18일 수십만 명의 홍위병이 중국 전역에서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으로 모였다. 마오 주석이 망루 위에 나와서 손을 흔들었다. 거리가 멀어 아주 작게 보였지만 황제를 알현하는 느낌이었다. 그는 아무 연설도 안 했지만 광장에는 감격의 함성이 진동했다.”
- 홍위병이 된 이유는.
- “그 때는 마오의 말을 따르는 게 애국인 줄 알았다. 나는 1949년 10월 1일 신중국이 세워진 이듬해에 태어났다. 우리 동갑내기들은 ‘공화국의 장남’이란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 때까지 나라가 하는 일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66년 8월18일 천안문 광장에서 첫 홍위병 집회가 열렸다. 이들은 사회에서 자본주의 추종 세력을 몰아낼 것을 다짐했다.(작은 사진) 망루 위에서 내려다보 는 마오쩌둥 과 린뱌오 , 저우언라이 (오른쪽부터). [중앙포토]
당시 ‘홍위병’ 싱페이언의 증언
“부모·선생님도 비판대 세우고 폭력
마음고생하던 친구는 결국 자살
천안문서 본 마오, 황제 알현 느낌
10년간 하방, 다시 가라면 절대 안 가”
- 68년 도시의 ‘지청(知靑·지식청년)’을 농촌이나 변방으로 보내 노동을 통해 재교육시킨다는 상산하향 운동이 시작됐다.
- “나보다 세 살 많은 형이 먼저 헤이룽장(黑龍江)성의 변방인 베이다황(北大荒)농장으로 갔고 나도 한 달 뒤 같은 곳으로 갔다. 언제 돌아올 것이란 기약도 없었다. 3남1녀 가운데 장·차남이 모두 가족과 생이별을 했지만 당시로선 그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본인의 장래나 가족의 신상에 정치적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마오 주석이 숨지고 4인방이 체포된 뒤에도 2년 더 있다 78년에 돌아왔다.”
- 생활은 어땠나.
-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는 극한 생활을 했다고 보면 된다. 황무지를 개간해 밭을 가는 게 주 임무였는데 해 뜨기 전에 나가 캄캄해지면 돌아오는 나날이었다. 그래도 공부는 해야겠기에 마오쩌둥 어록 영문판을 갖고 가 읽고 또 읽었다. 그것 말고는 제대로 된 영어 책이 없었다. 겨울엔 영하 삼십도 밑으로 내려갔고 폐렴에 걸리는 친구도 나타났다. 누구나 벗어나고 싶어 했다. 대원들 가운데 평판이 좋고 자질 있는 사람을 대학에 보내는 ‘공농병(工農兵)학생’ 제도가 생겨났는데 거기 뽑히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 인생의 10년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것 아닌가.
- “원망도 후회도 없다. 정신적으로 강인해진 면도 있다고 본다. 어떤 고난도 극복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 같은 게 나도 모르는 사이 생겼다. 하지만 다시 가라면 절대 안 갈 것이다.”
- 문화대혁명을 어떻게 평가하나.
- “두말할 나위 없이 심대한 오류를 범한 것이다. 목적이 뭐였든 결과가 어땠든 그런 방식의 정치투쟁은 다시 일어나면 안 된다.”
톈진=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