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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라의 아이슬란드 오디세이] <16> 천년의 세월이 호수 위를 떠다니네

중앙일보 2016.05.16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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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슬란드 남부에서의 첫 아침은 회픈(Höfn)이란 마을에서 맞이했다. 해가 뜨고도 남을 시간인데 밖은 이제 막 새벽이 온 듯 어스름했다. 커튼을 열자 물기를 가득 머금은 마을의 전경이 보였다. 지난 밤부터 내린 비가 지금까지 이어진 모양이었다. 숙소 주인이 마련해준 음식으로 아침을 때우고 오늘의 첫 목적지인 요쿨살론(Jökulsárlón)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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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마치 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무기력했다. 희뿌연 안개는 지표면까지 축 늘어졌고 빗방울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덩달아 울적해진 마음으로 요쿨살론에 도착했다. 물 위를 떠다니는 얼음의 무리가 보였다. 반사적으로 탄성을 내질렀지만 이내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넓은 호수와 큼지막이 솟아오른 빙산들, 볼리비아 소금사막에 버금갈 만큼 신비로운 물의 반영. 내가 상상하던 요쿨살론의 풍경은 이런 것이었다. 그러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기대하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하늘은 구름으로 가득 덮여 작은 틈 하나 볼 수 없고, 호수는 검푸르렀으며 흩어진 빙산 위로는 장대비가 비수처럼 꽂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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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라도 날씨가 갤까 싶어 차 안에서 기다린 지 20여 분이 지났을까. 나는 돌연 마음을 고쳐먹었다. 요쿨살론을 눈앞에 두고 또 다른 요쿨살론을 기다리는 꼴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배낭 깊숙이 처박아 두었던 우비를 꺼내입고 점퍼 속에 카메라를 품은 채 호수로 걸어갔다. 어둡기만 하던 물빛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오묘한 소라 빛을 띠기 시작했다. 수천 년이 넘는 세월이 얼어붙어 있는 거대한 빙하에서 녹아내린 물과 바닷물이 만나 만들어낸 색이었다.

호수 위를 수놓은 빙산들은 다양하게 푸르렀다. 표면에 검게 둘린 화산재는 오래된 나무의 나이테처럼 깊고 진했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유빙들은 물결을 따라 쓸쓸하게 흘렀다. 이들은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휘청휘청하면서도 먼 바다를 향해 유유히 헤엄쳤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홀로 정처없이 떠돌아다녔을까. 깊은 고독과 외로움, 왠지 모를 연민이 느껴졌다.

 처음에 느꼈던 실망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찬란한 햇빛과 화려한 반영이 있었더라면 저 쓸쓸한 얼음조각에 온전히 시선을 내줄 수 없었을 것이다. 원망스러웠던 날씨는 영겁의 시간이 깃든 빙하의 근본적 아름다움을 들여다보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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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를 따라 계속 거닐었다.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자 검은 모래밭 곳곳이 보석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뭍에 떠내려온 작은 유빙들이었다. 투명한 다이아몬드가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듯한 광경이었다. 놀라움과 환희가 느껴졌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요쿨살론에서 보냈다. 떠날 때까지도 비는 멈추지 않았다. 우비는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고 옷과 신발은 흠뻑 젖었다. 그러나 날씨는 더이상 상관없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하늘이 아닌 사람 마음에 달린 일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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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카프타펠 국립공원(Skaftafell National Park)으로 가는 길은 얼음 행성을 연상케 했다. 유럽 최대 빙하인 바트나요쿨(Vatnajökull)은 섬의 남동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전체 국토의 8%를 차지하는 규모답게 어딜 둘러보아도 거대한 빙하가 보였다. 샛길을 타고 들어가 빙하 가까이에 다가갔다. 마치 어마어마한 크기의 쓰나미가 코앞에서 일시 정지한 듯한 모습이었다. 손뼉을 짝하고 치면 와르르하고 다시 흘러내려 온 대지를 쓸어 버릴 기세였다.

크레바스가 만들어낸 얼음의 거친 결들은 멀리서도 선명했다. 그 사이를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져 가는 점처럼 까마득하고 아득했다. 대자연 앞에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새삼 와닿았다. 경이로움과 두려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쫓기듯 샛길을 빠져나와 약 1시간을 더 달렸다. 스카프타펠 국립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비가 그치고 안개가 걷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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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싱한 풀내음이 가득한 길을 따라 검은 폭포라고도 불리는 스바르티 폭포(Svartifoss)를 찾아 나섰다. 촉촉하게 젖은 흙길을 걷는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오솔길을 오르면 오를수록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는 또랑또랑해졌다. 30분쯤 걸었을까, 숨이 제법 차올랐다. ‘얼마나 더 가야 하나’ 생각이 들 때 쯤 폭포가 저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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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각형의 현무암 기둥이 늘어선 너른 절벽 가운데로 얇은 물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물기둥은 허리를 비틀며 치맛자락을 너풀거렸다. 내리막길을 따라 폭포 가까이 다가갔다. 밑에서 바라본 스바르티의 모습은 신비 그 자체였다. 깊은 숲속에 비밀 정원이 숨겨져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높게 뻗은 현무암 기둥은 검은빛 외에도 오색찬란한 색을 띠고 있었다. 흡사 돌과 나무를 깎아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조각한 장승들이 폭포를 에워싸고 있는 듯했다. 주변은 오묘한 보랏빛 가시나무와 녹색의 풀로 가득했다. 숨을 쉴 때마다 상쾌한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와 발끝까지 전해졌다. 온종일 젖었던 몸과 마음이 보송보송하게 마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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