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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원 선생님~ 죄송했어요" 20년 만에 꺼낸 제자들 마음

중앙일보 2016.05.13 02:39 종합 2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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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원 교장이 12일 장곡고 학생들과 교정을 걷고 있다. [사진 김춘식 기자]


그는 오늘도 교장실 창문을 활짝 열고 한동안 밖을 내다봤다. 30대로 보이는 이들이 학교로 걸어 들어오면 설레는 마음으로 가까이 올 때까지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장곡고(경기도 시흥시)의 이춘원(54) 교장의 이런 습관에는 애틋한 사연이 녹아 있다.

시흥 장곡고 이춘원 교장선생님
1995~2000년 가르친 1500명에게
“선생님과 20년 후 자신에 편지 써라”
이사 할 때 손편지·영상 먼저 챙겨
“너희가 넘어진 곳에 선생님 있다
언제든 편한 마음으로 찾아오렴”


경기도 부천시의 부명중에서 체육교사로 재직하던 그는 1995년에 제자들의 ‘영상 편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20년 후의 나, 배우자, 선생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이 달렸다. 이를 위해 당시 75만원짜리 비디오 카메라를 샀다.

그는 또 “선생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써 달라”고 해 손편지를 받기도 했다. “20년 뒤에 내가 TV 광고를 내 너희들을 찾을 테니 그때 나를 만나 각자의 영상과 편지를 찾아가라”고 했고, 학생들은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타임캡슐 프로젝트’는 경기도 시흥시의 함현고로 전근을 간 99년 이후로도 이어져 2000년까지 총 6년간 진행됐다. 약 1500명이 영상 편지를 남겼다. 이 교장은 이사를 할 때마다 이 영상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와 손편지를 제일 먼저 챙겼다.

지난 2일 학교에서 만난 이 교장은 ‘20년의 약속’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예체능 교사에게는 담임을 맡기지 않는 당시 관행 때문에 체육 담당인 나는 담임을 할 기회가 없었어요. 그래서 연말마다 아이들이 떠나면 마음이 휑했고요.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학생들과 연을 맺기가 어렵겠다고 생각했지요. 아이들과 추억을 남기기 위해 그 일을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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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장이 20년간 보관해 온 부명중 졸업생들의 손편지. ‘선생님께 이천원, 이천원 했는데 무척 죄송스럽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사진 김춘식 기자]


학생들이 남긴 영상 편지와 손편지에는 10대들의 발랄함이 깃들어 있다. “선생님을 ‘이천원’(이 교장의 이름에서 유래한 별명)이라고 불러서 죄송하다”며 장난기를 드러내기도 하고, “고입 공부를 해야 하는데 외모와 비싼 상표에만 관심이 간다”며 고민을 토로하기도 했다. “선생님이 말씀이 길고 너무 주관적인 것 같아 불만이었다”는 지적도 있었다.

20년 뒤의 재회를 계획한 이유에 대해 이 교장은 "학생들을 한 해 가르치고 나 몰라라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자랐는지 확인하는 ‘추수지도’를 하고 싶었다. 일종의 애프터서비스(AS)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며 웃었다.

이 교장은 지난해 한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96년에 가르친 제자들에게 약속을 상기시켰고 100여 명이 찾아왔다. 제자들은 ‘선생님 퇴임 뒤의 가족 동반 잔치’를 결의했다. 올해는 97년의 부명중 2학년 학생들과 만날 차례다. 당시 서른넷의 선생님은 쉰넷의 교장선생님이 됐고, 제자들은 딱 20년 전의 선생님 나이가 됐다. 이 교장은 “제자들이 모이면 함께 막걸리 한잔 하고 싶다”고 말했다.

20년 전 약속은 지금의 제자들에게도 자극이 됐다. 장곡고 2학년 학생들은 ‘교장선생님의 제자를 찾아 드리겠다’며 ‘애들’이라는 동아리를 꾸리고 인터넷 카페를 만들었다. 회원 학생들은 이 교장이 보관 중인 손편지를 스캔해 카페에 올리고 편지 주인들의 연락처를 수소문하고 있다. 이런 사연을 접한 SK텔레콤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주변 사람에게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영상으로 담아 전하는 ‘연결의 토닥토닥’ 캠페인을 통해 이 교장의 사연을 소개하면서 제자 찾기를 거들고 있다.

‘타임캡슐 개봉’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내년부터 순차적으로 98년의 부명중 2학년, 99년의 함현고 1학년, 2000년의 함현고 2학년 학생들을 만나 편지를 돌려준다. 이 교장은 번듯한 직함이 없어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제자를 위해 이 말을 전해 달라 했다. "제자들이 넘어질까 봐 늘 노심초사하는 것이 스승의 마음이다. 너희가 넘어진 곳에 선생님이 있으니 언제든 편한 마음으로 찾아와라. 사랑한다.”

글=채윤경 기자 pchae@joongang.co.kr
사진=김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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