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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패 다 보여준 한국, 이란 경제외교 ‘불리한 게임’

중앙일보 2016.05.13 02:07 종합 10면 지면보기
11일 서울 남대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경제외교 성과 확산을 위한 토론회’. 무역협회와 대한상의 등 경제 5단체 주최로 열린 이 행사에선 이란 경제사절단의 성과를 칭송하는 목소리가 잇따랐다.

52조 계약 등 너무 요란한 홍보
미·일·프랑스‘조용한 거래’와 대조
이란 맞수 사우디 등 자극 우려도

“경제사절단에 참여해 쉽지 않았던 양해각서(MOU)를 체결할 수 있었다.”(심기봉 덴티스 대표)

“한류와 우수 디자인을 무기로 20만 달러 수출을 추진하고 있다.”(김정주 뮈사 대표)

형식은 토론회였지만 경제사절단의 성과보고와 이란 시장을 재조명하는 자리였다. 기자가 행사 개최의 취지를 묻자 김정관 무협 부회장은 “한국 기업의 활약상을 국민에게 보여주자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지난 2일 청와대가 이란 현지에서 경제 성과를 발표한 뒤 열흘 동안 이어진 자화자찬이 11일 화룡점정을 찍은 셈이다.

이란은 한국만의 오아시스가 아니다. 미국·일본 등도 눈독을 들였다. 과연 이들 나라는 얼마만큼의 성과를 거뒀을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과 블룸버그, 프랑스의 르몽드, 중국의 바이두와 신화통신, 일본의 요미우리·니혼게이자이신문 등 5개 일간지를 뒤졌다. 검색 키워드는 판매(Sale)·주문(Order)·양해각서(MOU)·합의각서(MOA)·계약(Contract)이었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이들 매체에는 키워드 관련 기사가 보이지 않았다. ‘한국 정부가 52조원의 ‘잭팟’을 터뜨렸다’는 인용 기사만 일부 보일 뿐이었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주한 미국대사관과 유럽연합(EU) 한국대표부, 주한 미국·유럽 상공회의소에 전화를 걸었다. “왜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느냐”는 식의 대답만 돌아왔다. 그런 걸 왜 우리에게 물어보느냐는 것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 서울지국장을 지낸 한 일본 언론인은 “기업 간 거래는 어디까지나 민간 영역이라 일본의 경우 정부나 협회가 이를 관리, 홍보하는 일은 없다. 오히려 홍보나 보도 때문에 자칫 계약에 실패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기업 간 거래는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까진 계약이 아니다. 제3자의 간섭이나 공개로 물거품이 될 경우 법적 책임까지 물을 수도 있다. 경제 5단체가 사업 분야와 MOU 규모, 기업명까지 공개하며 이란 성과를 대대적으로 홍보한 것은 계약 체결에 좋은 영향을 줄 리 만무하다.

중동 지역의 특수성과 외교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점도 아쉬운 점이다. 큰 성과를 거둔 것은 좋지만 이란의 맞수이자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를 자극해서는 곤란하다. 최근 사우디는 대이란 강경주의자이자 왕위 계승서열 2위인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를 아람코의 최고위원회 의장에 앉히는 등 이란의 경제제재 해제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다. 이란 사업에 참여한 기업이 사우디와의 거래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란과 앙숙인 이라크의 심기도 살폈어야 했다. 이라크는 아직 테러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위험에도 다수의 한국 기업이 현지에서 개발 사업에 참여해 외화벌이에 나서고 있다. 이라크에 있는 국민의 안전을 생각했다면 조금 더 세심한 접근이 필요했다. 2014년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이라크에서 3조원 규모의 공항기지 건설 사업을 수주하고도 공시를 하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이란에 250억 달러 규모의 금융지원을 해주기로 약속한 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한국 기업이 해외시장에 진출할 때 정부나 금융기관이 발주자인 현지 정부의 보증을 서주는 일은 흔하다.

그런데 이란은 금융지원을 한국과 거래의 옵션이 아니라 필요조건처럼 요구하고 있다. 한국이 2009년 UAE에서 원전을 수주했을 때 대규모 금융지원을 해줬던 모습을 이란이 꼼꼼히 살펴본 게 틀림없다. 특히 KDB산업은행·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은 적자에 허덕이는 데다 조선·해운업의 구조조정에도 나서야 할 처지라 실제 지원이 가능할지도 미지수다.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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