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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인사이트]구조조정 선생, '구조조정'을 말하다

중앙일보 2016.05.13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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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호는 개기(改企), 기업을 바꿔놓는다고 그리 불렸다. 세간에선 파기(破企)라 부르며 저어하나 선생 스스로는 호기(好企)라 자부하는 바다. 선생은 난세에만 힘을 썼다. 요즘 선생의 이름이 온 천지에 가득한 것은 그만큼 세상이 어려워졌다는 방증이라.

이 땅에선 근 20년 전 외환위기 때가 선생의 전성기였다. 선생의 칼질 한 번에 대우그룹이 무너졌고, 단군이래 처음 은행이 문을 닫았다. 그때 직장·직업을 잃고 피눈물 흘린 자만 수만명. 당시 선생은 피도 눈물도 없다 하여 '철혈선생'으로 불렸다. 그러나 훗날 선생이 고백건대 "다시는 이 땅에 이런 비극이 없기를 바라며 스스로도 피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선생이 칼을 꺾고 다시는 쥐지 않으리라 결심한 지 어언 20년, 강호는 또 풍비박산이라. 세상에 선생을 부르는 목소리가 다시 커지니 선생의 마음도 심히 애통하였다. 이에 선생의 만단감회를 문답으로 남겨 세상의 거울로 삼고자 한다.
강호가 선생을 모시려는 정객들로 문전성시다.
속셈이 각각이니, 운신이 더 어렵다. 더불어민주당의 김종인노사가 제일 먼저 나를 먼저 찾아왔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경제수석을 했던 내공으로 내 진면목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썩어가는 환부를 도려내고 나라 경제 살릴 길은 오로지 내 칼질밖에 없다며 읍소하더라. 하지만 진심을 알기 어렵다. 능구렁이가 달리 능구렁이인가. 김 노사는 '노조를 상대할 비책부터 달라'고 하더라. 내 칼질에 쓸려 나갈 거제·울산의 노동자를 어쩔 것인지부터 물은 것이다. 그게 없으면 칼질도 하지 말라는 뜻이리라. 그야말로 칼 없이 풀을 자르며, 피 안 흘리고 살점을 도려내라는 것과 뭐가 다르랴
이른바 '한국판 양적완화'를 말하는가.
그렇다. 한국판 양적완화는 구두선일 뿐이다. 한국은행 돈이든, 정부 돈이든 상관없다. 본질은 구조조정엔 돈이 든다는 것이며 그걸 누가 대는게 좋겠느냐다. 돈에 어디 꼬리표가 달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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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구조조정에 왜 돈이 필요한가.
돈 없는 구조조정이야말로 날 없는 칼이요, 실탄 없는 총이다. 수술하는 데 피 없이 가능한가. 피가 얼마가 필요한지를 가지고도 정치권에선 시비를 한다. 정확히 얼마가 필요한 지 계산해놓고 청구하라는 건데, 그야말로 책상물림들 얘기일 뿐이다. 수술을 시작하면 피가 얼마가 들어갈지 아무도 모른다. 최소한~최대한은 대충 알 수 있다. 그러니 가능한 충분히 확보해놓고 시작해야 후환을 남기지 않을 수 있다. 20년 전 외환위기때 내가 만든 공적자금 투입 원칙도 그것이었다. ①신속 ②충분.
양적완화를 두고 '수술 일정 잡기 전에 병원비부터 내라는 격'이라는 비판도 있다. 앞 뒤가 바뀌었다는 거다.
바보 같은 소리다. 조선·해운 수술이 급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줄줄이 좀비 기업들이 기다리고 있다. 잘못하면 은행이 망가진다. 국책은행인 산업·수출입은행이 조선·해운사에 시중은행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많은 대출을 해줬다. 국가 기간산업에 대한 책임 때문이다. 대우에 빌려준 돈이 부실 채권으로 분류되면 당장 수출입·산업은행의 건전성은 사채업자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다. 국책은행의 신인도는 국가와 같다. 당장 대외 신인도가 떨어지고 금융시스템이 흔들릴 수 있다. 다른 좀비 기업 수술을 못하게 되는 건 물론이요 좀비들이 한꺼번에 쓰러지는 '부도 대란'이 날 수 있다. 그럼 시중은행들까지 영향을 받게 된다. 대한민국 금융 시스템이 송두리째 망가질 수 있다. 그걸 막으려고 실탄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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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그럴듯하지만 결국 한국은행에 총대를 매라는 것 아닌가.
재정이냐 중앙은행 발권력이냐는, 결국 누가 면피를 하느냐다. 청와대와 기획재정부, 한은이 핑퐁게임을 하고 있는 셈이다. 명분과 논리, 원칙을 따지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가. 구조조정은 진검 승부다. 한 칼에 승부를 갈라야 한다. 질질 끌면 아무 것도 못한다.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한국판 양적완화 논쟁이 의미 없다는 얘기인가.
"아니다. 의미는 있다. 굳이 공과를 따지자면 공 6, 과 4다. 묻힐 뻔 했던 구조조정 이슈를 세상에 드러내 힘을 실었다. 놔뒀으면 아무도 나를 세상에 불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판 양적완화'는 그것으로 제 할 일을 다했다. 하지만 이젠 사라질 때가 됐다. 이름 때문에 혼선도 심하다. 한은 특융이나, 구조조정 자금 마련으로 이름부터 바꿔 불러야 할 것이다.
(구조조정을)잘하면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는데도 정객들이 앞다퉈 선생을 청하는 이유는 뭔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기 싫어서다. 수술은 쉽다. 죽든 살든 결론도 빨리 난다. 그러나 회복은 또 다른 문제다. 잘못되면 누군가 책임져야 한다. 그 책임을 나에게 미루는 것이다. 
선생은 20년 전 깔끔하게 좀비 기업·은행을 수술했다. 그런데 또 세상이 좀비들로 득시글하게 됐다. 누구의 잘못인가.
세상이 아는 바, 5적(敵)때문이다. 제일 적은 정치인이다.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좀비 기업주가 읍소하면 정치꾼들이 뛴다. 은행을 겁박하거나 아예 칼을 빼앗아 버리기도 한다. 제이 적은 관료다. 예나 지금이나 관료들은 약방의 감초다. 돈 되고 이권 되면 빠지는 법이 없다. 그러니 칼질은 절대 반대다. 복지부동, 꼼짝도 안 한다. 내 임기 중엔 절대 안 된다가 신조다. 잘못 총대 멨다가 죄 없이 감방 간 변양호 이후 공직 사회에 굳어진 철칙이다.
3적은 귀족 노조, 4적은 재벌, 5적은 은피아, 선생은 20년 전에도 5적을 말했다. 그들의 작태가 여전하단 얘긴가.
그렇다. 재벌과 노조는 서로 손가락질 하지만 누구도 책임을 떠안으려고 하지 않는다. 은피아는 면피만 하면 된다. 좀비 기업이 많을수록 좋다. 퇴직 후 갈 자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나를 반기는 이는 하나도 없다. 말로는 칭송하지만 뒤돌아서면 손가락질하기 일쑤다. 그게 내 운명이다.
선생은 말끝에 어렵게 몸을 일으켰다. 급기야 강호 출도인가. 묵묵히 칼을 챙기는 선생의 뒷모습이 허허롭다. 하기야 또다시 칼에 피를 묻혀야 한다. 읍참마속, 울며 마속을 벤 제갈량인들 어찌 지금 선생의 심사를 헤아릴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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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정치가 개입하면 구조조정이란 배는 산으로 간다. 좀비 기업들의 로비와 지역 정서, 노동자들의 민원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구조조정은 "정치가 할 일"이라는 주장이 있다. 정치적 의사 결정 없이 이 땅에선 구조조정이 안 된다는 것이다.

우선 관료가 움직이지 않는다. 훗날 책임 추궁이 두렵기 때문이다. 관료 집단이 강하게 압박하지 않으면 채권단도 면피만 하려고 할 것이다. 정부·은행 두 축이 움직이지 않으면 좀비 기업주·경영자와 노동자의 반발을 감당할 주체가 사라지게 된다. 애초 구조조정이 시도조차 어려워지는 것이다.

정치가 큰 틀을 결정하되 관료에게 세부 집행을 맡기는 식의 정·관 공동 책임론이 대안이 될 수 있다. 대규모 구조조정에 따른 사회 불안을 해소할 실업 대책 등 큰 틀을 정치가 몇 개의 선택지로 압축해 정해주면, 그 중 하나를 관료가 선택해 집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관료들은 책임에서 벗어나서 좋고, 정치권은 할 일을 해서 좋다. 국민적 합의라는 포장도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론 여야 정쟁과 노사 대립 등, 갈등 조정을 위한 시간과 비용을 감당하기 쉽지 않은 게 약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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