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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국민 보는 앞에서 “형님” 그리고 반말

중앙일보 2016.05.10 19:09 종합 31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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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
논설위원

공사(公私) 구별은 사회생활의 기본이다. 공적 행사와 사적 모임은 어법부터가 달라야 한다. 일반 국민에게 이는 상식이다. 그런데 오히려 정치 지도자들이 거꾸로 상식을 내동댕이치고 있다.

비록 1석이 모자라 제2당이 됐지만 새누리당은 엄연한 집권당이다. 그런 당의 원내 지도자라면 야당에 대해 절도와 권위를 지켜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진석 대표는 상견례에서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에게 “형님”이라고 했다.

정 대표는 20여 년 전 정치부 기자로 야권 인사 박지원과 인연을 맺었다. 여야를 막론하고 기자들이 나이 많은 정치인을 형님으로 부르는 건 흔한 일이다. 그런 친근한 호칭이 취재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기자가 많다. 그러나 이런 호칭은 사석에서나 쓰는 것이다. 국민이 보는 앞에서 122석 집권당 원내대표가 38석 원내대표에게 “형님”이라고 하면 집권당의 권위는 뭐가 되나.

우상호 대표는 123석 제1당의 원내 지도자다. 그런 우 대표가 상견례에서 박지원 대표에게 “선배님”이라고 했다. 더불어민주당에서 오랫동안 정치를 같이했으니 그런 호칭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호칭 역시 사석에 머물러야 한다. 여소야대 국회의 최고사령관이 제3당 원내대표에게 공개적으로 그런 호칭을 쓰면 국회의 질서는 어떻게 되나.

정치 경력의 시대성으로 봐도 공개적인 이런 호칭엔 문제가 있다. 우 대표는 5공 때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던 86 운동권의 대표주자다. 혁신 정치를 상징해야 하는 인물인 것이다. 반면 박 대표는 대표적인 구(舊)정치 리더다. 뇌물 전력으로 감옥에 다녀왔고 허위폭로 논란에 여러 차례 휩싸였다. 새 정치든 헌 정치든 사석에선 후배가 연장자에게 ‘형님’ ‘선배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국민이 듣는 데서 그렇게 하면 혁신 정치 세대의 기개와 자존심은 어디로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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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권당과 제1당의 원내대표가 이렇게 행동하니 제3당 박 대표가 거리낌 없이 반말을 한다. TV 카메라 앞에서 그는 두 대표에게 반말을 썼다. 이것도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박 대표는 나이가 훨씬 많다. 그는 74세, 정 대표 56세, 우 대표 54세다. 하지만 정치를 나이로 하나. 나이가 많다고 국민 앞에서 다수당 대표들에게 반말을 할 수 있나. 국회가 종친회나 동창회인가.

‘공개적인 반말’은 한국 정치의 퇴행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무례(無禮)다. 이한구 새누리당 공천관리위원장은 TV 카메라 앞에서 기자들에게 자주 반말을 했다. 기자는 국민을 대신해 취재하는 것이다. 나이가 어리다고 기자에게 반말하는 건 국민에게 반말하는 것이다. 이런 반말은 일부 정치인의 습관적인 오만이다. 새누리당이 왜 참패했는지 그도 알 것이다.

이 위원장의 반말은 새로운 게 아니다. 김무성 전 대표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기자에게 반발을 하곤 한다. 그는 5공 시절 민추협을 통해 정치에 입문했다. 당시 상당수 기자는 야권 인사들과 형제애 같은 교감을 느꼈다. 반(反)독재 인식을 공유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엔 형님이란 호칭이 더욱 많았다. 정치인도 친근감에서 반말을 자주 사용했다. 김무성에게는 이런 정서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민주적인’ 반말이라도 공적인 자리에선 예의가 아니다. 민주화 시대든, 지금이든 기자는 기자고 정치인은 정치인이다. 서로가 지켜야 할 금도가 있는 것이다. 여당 대표가 지키지 않으니 김종인 야당 대표도 서슴없이 기자들에게 반말을 한다.

기자는 국민을 대신해 취재한다. 국민의 자존심을 업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요즘엔 부끄러운 장면이 한둘이 아니다. 정치인은 서거나 의자에 있는데 기자들은 바닥에 앉는다. 방바닥이나 복도 심지어 집 앞 땅바닥에 앉는다. 사실 언론의 취재환경이 열악해진 건 사실이다. 신문·방송·인터넷이 많아지고 기자 수도 급격히 늘었다. 양질의 취재 질서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이런 환경일수록 언론에 대한 정치인의 배려가 중요할 것이다. 나이가 어리다고, 시도 때도 없이 마이크를 들이댄다고, 바닥에 앉아 있다고 반말을 해도 되나. 기자들이 바닥에 앉는 건 그들의 책임이라고 치자. 그렇지만 그게 전부인가. 상징적으로라도 의자에서 내려와 함께 바닥에 앉아 얘기를 나눈 정치 지도자가 있나. 쇼맨십이라도 좋으니 한두 번이라도 그렇게 해본 정치인이 있나.

언론은 경쟁에 묻혀서, 젊은 지도자들은 감투에 들떠서, 오래된 정치인들은 구습과 오만에 젖어서 예의와 절도를 잃어버리고 있다. 그래서 한국 정치에서 기개와 자존심이 사라지고 있다. 진정한 형님과 선배가 한국 정치판에는 없다.

김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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