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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라의 아이슬란드 오디세이] ⑮ 하늘이 초록빛 춤을 추다

중앙일보 2016.05.09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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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티포스(Dettifoss)에 도착했을 때는 바람이 몹시 불었다. 하늘은 옅은 잿빛을 띠었고 구름이가득했다. 공룡의 등 껍질 같은 불모지를 10여 분 걷자 저 멀리 우렁찬 폭포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마치 수많은 군사들이 벌판을 달리며 내지르는 함성 같았다. 데티포스가 유럽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폭포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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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언덕을 넘고 폭포가 시야로 들어왔을 때 나는 그야말로 ‘억’ 소리를 내고 말았다. 100m에 달하는 너비를 가득 채운 엄청난 양의 강물이 세차게 흐르다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협곡 속으로 거침없이 흘러들었다. 남쪽의 빙하에서부터 화산재와 모래를 쓸고 온 폭포물은 하늘과 닮은 잿빛이었다. 대기는 물의 고함으로 가득했고, 물보라는 바람에 날려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진흙과 얼음, 간밤에 내린 눈으로 뒤섞인 길을 따라 밑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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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 앞에 섰을 때 얼굴과 몸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물방울이 속눈썹을 타고 흘러 시야는 흐릿하고 귀는 먹먹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낼 때마다 보이는 것은 쩍하고 갈라진 대지와 광활한 폭포, 그뿐이었다. 구약성서에 나온 대홍수가 이랬을까. 지구 어딘가에 구멍이라도 나서 온 바닷물이 우주 밖으로 쏟아져 내리면 이 같은 광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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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로메테우스’의 오프닝 시퀀스를 떠올렸다. 태초의 지구에 도착한 외계 종족이 거대한 폭포 앞에 다가선다. 검은 액체를 들이켠 그의 육신은 갈가리 찢겨 거대한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물살을 타고 지구 곳곳으로 흘러든 살과 DNA는 인류를 생성한다. 소름 끼치도록 강렬한 이 장면의 실제 배경이 바로 데티포스였다. 폭포 앞에 선 나는 왜 영화의 도입부를 여기서 촬영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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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협곡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방대한 폭포수는 마치 대자연(Mother Nature)의 문이 처음으로 열리고 그곳에서 쏟아져 내리는 양수 같았다. 물결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얀 포말을 만들며 흐르는 물결의 모습은 갈기를 휘날리며 달리는 말처럼 생명력이 넘쳤다. 지금 지구가 멸망하고 이곳에서 다시 시작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문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의 엄숙함과 장엄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넋을 놓고 광경을 목도하는 것뿐이었다.

 데티포스를 떠난 후에도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날은 이미 졌고 갈 길은 멀었다. 1번 국도를 타고 섬의 동쪽으로 향했다. 칠흑 같은 밤을 침묵과 함께 달린 지 몇 시간이 지났을까. 느낌이 이상했다. 졸린 것도 아닌데 시야가 흐물흐물했다. 아니, 창밖의 하늘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뛰고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오로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슬란드에 도착한 날부터 매일같이 거르지 않고 한 것이 있었다. 오로라 예보를 수시로 들여다보고 밤이건 새벽이건 간절한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었다. 오로라의 땅으로 유명한 아이슬란드지만 오로라 관측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곳에 진득하니 붙어있거나, 오로라만 쫓아 다닌다면 모를까. 나 역시 십수 일을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지만, 이 기이한 자연현상은 번번이 나를 비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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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 오로라를 못 보고 가는 것은 아닌가 낙담하던 참이었다. 심지어 일기 예보도 별 볼 일 없었다. 하늘에는 먹구름도 가득했다. 맑은 밤하늘에만 퍼진다는 북극광이 나타나기엔 터무니없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밤하늘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 희미하지만 옅은 녹색 빛줄기가 공중에 드리우기 시작했다. 빛줄기는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여행자를 농락하다 일순간 하늘에 쫙 하고 펼쳐졌다. 그러더니 마치 부드러운 음악을 연주하는 하프의 선율처럼 천천히 일렁였다.

 급히 공터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오로라는 세력을 넓혀 머리 위를 가득 뒤덮었다. 신기하다 못해 헛웃음이 나왔다. 오로라는 태양에서 날아온 전기입자가 지구 안으로 파고들어와 공기 입자와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파장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과학지식이 무슨 소용이겠나. 중세 사람들은 오로라를 ‘신의 계시’로 생각했고, 북아메리카 원주민은 오로라를 ‘신의 영혼’이라 일컬었다. 눈 앞에 펼쳐진 신비로운 현상을 이해하기에는 이들의 믿음이 훨씬 도움이 되는 듯했다.

매서운 바람에 귀가 떨어질 것처럼 아려왔다. 하지만 하늘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다른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콧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것도 모른 채 바보처럼 오로라를 바라볼 뿐이었다. 빛의 향연에 온 세상이 밝아졌다. 산맥이 보이고 낮게 깔린 구름이 드러났다. 이곳이 어딘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아이슬란드 북동쪽 어디쯤일 것이었다. 하늘은 색색의 비단을 쥐고 나풀거리며 우아하게 춤을 추었다. 나는 이름 모를 땅에서 영혼의 춤사위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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