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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의 시시각각] 박근혜 앞에 멈춘 폭탄돌리기

중앙일보 2016.05.05 19:08 종합 26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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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논설위원

박지원(국민의당)·정진석(새누리당)·우상호(더불어민주당) 세 사람이 시차를 두고 20대 국회 원내대표로 차례로 확정된 시점에서 우리는 개봉하고 싶지 않은 대우조선해양의 구조조정 청구서를 받았다. 외환위기 때 국책은행(산업은행)이 인수한 대우조선은 16년간 낙하산 인사와 도덕적 해이의 나른함을 즐겼다. 누구도 총대를 메지 않았다. 정치권의 경고는 없었고 단임제 대통령은 폼 나는 치적만 추구했다. 경제부총리는 자기 손에 피를 묻히려 하지 않았다.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나 금융위원장, 산업은행 회장의 책임 있는 조치는 없었다. 대우조선은 은퇴한 공직자들의 달콤한 꿀단지, 민주노총이 보호하는 정규직 근로자의 천국이었다. 그 사이 투입된 정부 자금이 6조5000억원인데 지난해 말 기준으로 이 회사의 부채비율은 7300%. 아무도 브레이크를 밟지 않은 미친 빚의 질주가 3권분립, 정부 감시, 금융 감독이 엄연한 나라에서 벌어졌다.

대우조선 부채비율 7300%
3당 원내대표 협조 구해야


16년간 정권과 다수당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대우조선에 근원 수술이 가해진 건 김대중 대통령 때 한 번뿐이었다. 그 외엔 응급 수혈만 하거나 수술하는 척하다 다시 덮는 일의 반복이었다. 잘나갈 때 털어내지 못한 정부기업이 결국 국민 혈세만 빨아먹는 흡혈귀가 된 것이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뒤늦게 메스를 들고 수술대 앞에 섰으나 환부를 적출, 제거할 수 있다는 결의와 전권을 갖고 있을까. 정치인 출신인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수만 명 실직이 가져올 파장을 받아낼 준비를 하고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국회와 국민은 그들을 밀어줄 것이다. 비겁한 장수는 버리고 임전무퇴(臨戰無退)를 솔선하는 장군을 따르는 게 예부터 우리의 국민성이었으니까.

박근혜 대통령은 여전히 한국 경제 운명의 고삐를 쥐고 있다. 대우조선 문제를 계기로 우리 사회에 확연히 떠오른 해운·조선·철강·건설·석유화학 등 공급과잉 5대산업의 구조조정 숙제를 해낼 수 있겠는가. 이들 제조업에서 군살을 확 빼고 거기서 발생하는 인력·자산과 국민적 에너지를 제4차 산업혁명으로 전환할 상상력을 품고 있는가가 관건이다. 박 대통령은 대우조선 수술→5대산업 개편의 시대전환적 의미를 좀 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빈곤에서 비만으로 불어난 몸집의 다음 수순은 지방을 태워 없애는 것이다. 자기혁명적 고통이다. 이 고통에서 한국 경제의 날렵하고 매력적인 몸매가 창조될 것이다. 박 대통령의 창조경제 업적은 16개 시·도에 세운 창조혁신센터가 아니라 한국 경제의 체질을 창조적으로 바꿔냈다는 평가에서 찾아져야 한다.

박 대통령은 대우조선과 5대산업 구조조정에 대해 선거 참패에 국정 지지도가 최악일 때 불쑥 던져진 낯선 숙제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대우조선 폭탄돌리기는 끝났다. 뇌관 해체의 책임자는 박 대통령이다. 낯선 길은 익숙한 길이 아니지만 지름길일 수 있다. 이 낯선 의제는 대통령이 자신의 어젠다라고 믿는 파견법을 국회에서 야당의 저항 없이 통과시킬 왕도이기도 하다. 구조조정을 통해 수많은 근로자가 한꺼번에 노동시장에 쏟아지는데 야당이 파견 근로를 무조건 반대할 수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발생한 구조조정 문제에서 미래에 전개될 창조경제의 비전을 발견해내는 건 대통령의 몫이다.

이란을 다녀온 박 대통령이 제일 먼저 할 일은 3인의 신임 원내대표를 만나는 것이다. 20대 국회의 원내 리더 세 사람은 3~4선 당선자들이다. 오랜 세월 키워진 대우조선의 무능과 부실에 그들도 책임을 나눠야 한다. 허구한 날 증오와 극단의 당 대 당 싸움을 하다 대우조선 문제를 놓친 것 아닌가. 3인의 원내 사령탑은 과거 어느 때보다 소속 정당의 압박에서 자유롭다. 대통령의 힘은 떨어졌고 차기 대선후보들은 등장하지 않았으며 당 대표는 임시 체제다. 대권 싸움이 본격화할 연말까지 8개월간 그들은 당의 이익이 아니라 국가의 이익에 매진할 최적의 환경에 놓여 있다. 대우조선 문제에서만큼은 대통령과 원내대표 3인이 국익당(國益黨)을 결성해 한 곳만 보고 가길 바란다.

전영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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