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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텔링] 1억에 산 그림이 ‘다이궁’ 밀수품…눈앞 캄캄해진 안과의사

중앙일보 2016.05.05 01:22 종합 12면 지면보기
베이징(北京)의 봄은 유난히 추웠다. 쌀쌀한 바람에 연신 옷깃을 여몄다. 약속장소에 늦지 않으려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중국 베이징에 분원 내려던 의사
지인 소개로 사업가 김 사장 만나
시립미술관장이던 작가 그림 구입
알고 보니 탈세 위한 밀반출 그림
작가 “밀반출하는지 전혀 몰랐다”

서울에서 안과를 운영하는 나는 2011년 3월 중국 베이징을 찾았다. 현지인과 동업해 분원을 내기 위해서였다. 그런 내게 한 지인이 귀띔을 했다. “혹시 김 사장 알아요? 현지에서 원장님을 도울 수 있을 거 같은데….”

낯선 중국 풍경에 걱정이 앞서던 차에 적이 안심이 됐다. 김씨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말끔한 차림에 성실한 사업가처럼 보였다. “저만 믿으세요. 분원 차리는 일 정돈 어렵지 않습니다.”

그는 친절했다. 처음 보는 내게 통역사와 운전기사가 딸린 고급 차량을 제공했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그의 사무실에 걸린 고가의 미술품들이었다.

“이름만 대면 아는 유명 화가들과 친해요. 작가들에게 용돈도 주고 작품 거래도 중개해 줍니다. 이런 미술품만 1000점 넘게 소장하고 있어요.”

그런 김씨는 특히 황영성(74) 작가를 자주 입에 올렸다. 광주 출신의 김씨는 황 작가에 대해 “동향으로 형·동생 하는 사이”라고 했다. 당시 광주시립미술관장을 맡고 있던 황 작가는 그림 한 점이 5000만~1억원을 호가할 정도로 미술계에선 유명 인사였다.

“일은 걱정 말고, 황 작가 그림이나 몇 점 사 가요. 아무나 못 사는 거예요.”

하지만 비싼 가격이 마음에 걸렸다. 생각해 보겠다고 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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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 병원 분원을 내기 위해 베이징(北京)에 갔다가 사업가 김모(64)씨를 만났다. 김씨는 당시 광주시립미술관장인 황영성 작가의 그림을 보여 주고 몇 달 뒤 황 작가를 소개했다.


띠리링~. 며칠 뒤 김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곧 한국에 도착합니다. 황 작가를 소개해 줄게요.”

광주에서 만난 김씨는 내게 시립미술관을 구경시켜 줬다. 이어 황 작가와 인사를 시켜 주고 식사도 함께했다. 둘은 친해 보였다.

‘새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2012년 초 김씨가 e메일을 보냈다. 베이징 전시회 때 공개된 황 작가 그림 3점의 사진이 첨부돼 있었다. 대표 작품명은 ‘가족의 의미’. 사물을 선과 기호 등으로 단순화해 표현하는 황 작가 특유의 화풍이 잘 나타나 있었다.

“새 병원에 걸어 두면 얼마나 보기 좋아요. 원래 2억원이 넘는데 1억1100만원에 사게 해 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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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작가의 작품 구매대금으로 김씨에게 1억 여원을 송금했으나 그는 그림도 주지 않고 분원 설립사업도 미룬 채 연락을 피했다.


나는 김씨를 믿고 구매대금을 송금했다. 며칠 뒤엔 분원 개원을 위해 급전이 필요하단 말에 1억5000만원을 빌려 줬다. 그날 이후 김씨의 태도가 돌변했다. 연락을 잘 받지 않고 내 문자에도 답을 피했다. 약속한 그림은 구경도 못했다. 이건 뭐지? 가슴이 철렁했다.

설상가상으로 분원을 내려던 계획도 무산되면서 의사 인생에 위기가 찾아왔다. 나는 주로 형편이 어려운 노인들을 상대로 저렴하게 안과 시술을 해 왔다. 하지만 이 문제에 시달리고 중국을 오가느라 자연스레 병원 업무에 소홀해졌다.

노인 고객들의 발길이 점차 끊겼다. 병원 매출도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한숨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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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 대상 그림들이 보따리상을 통해 중국으로 반출된 작품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김씨를 세관에 고발해 지난달 29일 지명 수배됐다.


“저 기억하죠? 잠시 얘기 좀 하고 싶은데….” 어느 날 해외 발신전화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때 김씨 밑에서 일하던 J씨(44)였다. 그의 폭로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내가 구매하려던 황 작가의 그림들이 중국으로 불법 밀반출된 작품이란 거였다.

김씨는 베이징 전시회를 앞두고 ‘다이궁(代工)’이라 불리는 보따리상에게 황 작가의 그림 수십 점을 쥐여 주고 배를 태워 보냈다고 한다. 일부 작가나 미술품 중개를 맡은 업자들이 해외에서 작품을 판매할 때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쓰는 수법이란 것이다.

놀란 나는 광주본부세관에 김씨와 황 작가를 고발했다. 세관에 확인해 보니 실제 2010년과 2012년 전시회를 위해 중국으로 건너간 황 작가의 그림 80여 점 중 30점 정도가 세관을 거치지 않고 밀반출됐다고 한다.

황 작가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했다. “작품 관리는 당시 김씨에게 위임했습니다. 밀반출에 대해선 난 전혀 모릅니다. 지금 김씨와 연락도 닿지 않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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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본부세관은 일단 황 작가는 제외하고 김씨만 관세법 위반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인사동 거리를 걷고 있는데 세관에서 “김씨가 지난달 29일자로 지명수배됐다”고 알려왔다. 골목에선 이름 모를 거리의 화가가 그림을 진열해 놓고 있었다. 그림을 몇 점 사서 병원에 걸어 놨다. 사기 피해 4년의 뒤끝은 씁쓸했다.

※안과 의사 이모(40·여)씨를 인터뷰한 내용과 광주본부세관, 사건 관계자 등을 취재한 내용을 토대로 이씨의 시점에서 재구성했습니다.

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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