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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러시아를 보드카병에서 구한 것은

중앙일보 2016.05.05 00:11 종합 27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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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러시아에 역사적이라 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 보드카 소비량이 급감한 것이다. 1995년부터 줄기 시작한 보드카 소비량은 2014년 한 해 동안 12%나 감소해 95년 대비 이제 거의 절반에 불과하다. 그 대신 맥주 소비량이 증가했다. 95년에 러시아인의 78%가 자신을 보드카 애호가라고 응답한 반면 맥주 애호가는 20% 정도였다. 그러나 2007년에는 알코올 소비량 중 맥주와 보드카 소비가 각각 79%, 13%로 상황이 역전됐다. 독주보다 순한 술을 마신 결과로 알코올 농도를 감안한 순알코올 소비도 줄었다. 그 덕택에 러시아 남성의 사망률이 30% 남짓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보드카는 슬라브족의 상징이며 정체성이라고 여겨질 만큼 그 소비를 줄이기 어려웠다. 심지어 중세 러시아 왕이 종교를 택할 때 금주 계명 때문에 이슬람을 배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정도다. 85년 정권을 잡은 고르바초프는 소련 경제의 침체 원인을 음주 때문이라고 믿고 대대적인 반(反)알코올 캠페인을 벌였다. 보드카 주조공장을 폐쇄하고 가격을 크게 올렸다. 공식 통계는 알코올 소비량이 절반으로 줄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비밀 통계에 따르면 그 기간에 설탕 소비가 배로 증가했다. 밀주를 만들어 마시거나 암시장에서 팔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왕도 인정하고 사회주의 정권도 해결하지 못한 러시아인의 보드카 중독을 고친 것은 무엇인가.

러시아의 보드카병(病)을 해결한 것은 바로 시장이었다. 92년부터 러시아가 시장경제로 바뀌게 되자 과음의 기회비용이 크게 높아졌다. 사회주의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가 보장되므로 실업 염려 없이 대낮부터 보드카를 마셔댈 수 있었다. 과음하더라도 정부에서 정해진 월급은 그대로였다. 시장 경쟁이 없으므로 술 때문에 퇴출당할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보드카를 함께 마시며 다져 놓은 인맥이 사회생활과 출세에 더 중요했다. 그러나 시장이 들어오자 모든 것이 변했다. 보드카에 중독되면 소득이 줄고 일자리를 잃고 경쟁의 패자가 됐다. 그러기에 젊은 사람들부터 보드카를 버리고 발티카(러시아 맥주의 이름)로 갈아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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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인간 사고와 행동의 근본을 바꾼다. 막스 베버는 중세를 수직적 위계 관계로, 근대를 시장 중심의 수평적 관계로 이해했다. 수직적 관계에서는 권력자에 대한 충성이 자신의 명운을 결정하지만 시장 관계에서는 익명의 소비자가 원하는 물건을 팔면 성공한다. 따라서 근대의 개인은 권력자로부터 독립해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된다. 애덤 스미스는 자본주의를 상업의 시대로 불렀으며 몽테스키외는 상업의 정신을 검약·신중·근면·규칙으로 규정했다. 시장이 편만해지면 독립심이 증가하고 자유를 추구하며 더 열심히 일하게 된다는 것이다.

시장은 북한의 주체사상형 인간형을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하는 인간)로 바꿀 잠재력을 갖고 있다. 서울대 팀의 연구에 따르면 북한에서 시장 활동을 한 사람들의 자본주의 지지도는 하지 않은 사람보다 높고 남한 주민보다는 낮아 그 중간 정도에 위치한다. 최근 만난 한 탈북민의 얘기도 흥미롭다. 북한의 한 영재학교에 합격한 아이가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의 합격을 부모 덕분이라고 하며 김정은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경죄로 큰 소동이 벌어졌고 합격은 취소됐다. 그러나 사람들은 부모가 장마당에서 열심히 일해 공부시킨 것을 아는 아이가 바른말을 한 것이 아니냐며 그 아이를 옹호했다고 한다.

북한 노동당 7차 대회가 내일 열린다. 이 대회에서 김정은은 군사대국뿐만 아니라 경제대국이 되었음을 선언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1인당 800달러 정도에 불과한 국민소득을 가진 나라가 경제대국이라 선언한다면 북한의 깡마른 소도 웃을 일이다. 그렇다고 경제개혁의 휘황한 설계도를 보여주기도 어렵다. 시장화를 촉진하는 조치를 발표하면 김정은이 서 있는 내리막길의 경사는 더욱 기울어질 것이다. 반대로 가계소득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시장을 철폐하고 사회주의 경제를 복원하려 한다면 대규모 경제 위기가 일어날 가능성뿐 아니라 주민들의 거센 저항도 배제할 수 없다.

경제는 권력자의 말보다 그 구조에 의해 움직인다. 사회주의 위업을 달성하겠다던 여러 독재자의 휘황찬란한 말과 정책도 소련이 붕괴로 가는 길을 막지 못했다. 이번 대회에서 김정은이 시장경제로의 이행 이외에 어떤 경제정책을 내놓더라도 긍정적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행사에 동원된 수많은 북한 주민의 마음은 몸과 분리되어 시장에서 밥벌이 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이제 시장이 북한을 움직이고 있다. 이 상업의 시대에 북한 경제의 최고사령관은 김정은이 아니라 시장이다. 러시아의 보드카병을 치료한 시장이 과연 김정은의 핵무기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인가.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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