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가 반드시 ‘변월룡전’을 봐야 하는 이유

중앙일보 2016.05.04 01:15 종합 25면 지면보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개막한 ‘변월룡전’은 화가의 탄생 100주년을 기려 마련된 국내 최초 회고전이다.” 중앙일보 3월 15일자에 실린 이 기사를 나는 단순히 특이한 전시회 소개의 하나로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이 전시회를 보니 벅찬 감동의 기쁨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일어났다. 20세기 한국 현대미술사의 사각지대에 이처럼 훌륭한 화가가 있었다는 것은 정녕 기쁨이었고, 내가 변월룡이라는 화가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기사 이미지

변월룡의 ‘자화상’(부분) 캔버스에 유채, 75X60㎝, 1963.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유홍준 교수 기고
남과 북 모두 외면한 잊혀진 거장
‘판문점 포로…’ 희대의 역사 기록
백남준·이응노와 동등하게 조명을

변월룡은 1916년 연해주에서 태어난 고려인이었다. 그는 뛰어난 그림 솜씨로 53년, 38세에 옛 소련에서 가장 유명한 레핀 예술학교 교수가 되어 러시아 아카데미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우리 마을을 찾아온 레닌’ 같은 선전화를 많이 제작하였다. 그는 분명 출세한 고려인 화가였다.

그러한 변월룡이 우리 현대미술과 직접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은 53년 7월, 소련 정부로부터 북한 미술계를 지도하라는 파견 명령을 받고 평양에 오게 되면서였다. 그는 평양미술학교를 재건하고 있던 김주경, 문학수 같은 월북화가들을 성심으로 지도하였고 북한에 머문 1년 3개월간 많은 작품을 남겼다.
 
기사 이미지

‘판문점에서의 북한포로 송환’, 캔버스에 유채, 51X71㎝, 1953.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그는 특히 초상화에 뛰어났다. 월북 문화예술인으로 소설 『대동강』의 한설야, 『두만강』의 이기영, 『근원수필』의 김용준,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 그리고 평범한 인민을 그린 ‘빨간 저고리의 소녀’ 등은 그 자체가 명작이며 동시에 우리 역사의 기록이다. 그의 초상화는 배경과 포즈는 물론이고 얼굴의 각도, 눈빛의 표현을 통해 그 인물의 내면적 리얼리티를 깊이 있게 포착해 내고 있다.

그는 풍경화도 많이 그렸다. ‘대동강변의 여인들’, ‘모내기’ 같은 작품은 당시 사회상을 생생히 전하고 있는데 ‘이발소 그림’ 같은 통속성이 예술로 승화된 것 같은 친숙감이 일어난다. 그런 중 군복을 벗어 던지고 하얀 팬티 바람으로 군 트럭에 오르는 ‘판문점에서의 북한포로 송환’은 다시 볼 수 없는 희대의 역사 기록화이다.

변월룡은 임무를 마친 뒤 레핀 예술학교로 복귀하여 90년 7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작가 생활을 이어갔다. 귀국 후에도 초상화에 열중하여 『닥터 지바고』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외투를 걸치고 집필하는 모습을 그린 명작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변월룡이건만 남에서는 그가 적성국가 소련의 화가여서 알려질 수 없었고, 북에서는 영구귀화를 거부했다고 그의 이름이 이내 지워졌다.

그러나 변월룡은 끝까지 고려인이기를 원하여 러시아 이름으로 개명하지 않았고, 어머니의 초상화에서는 항아리 옆에 한글로 ‘어머니’라 써넣었다. 이렇게 우리가 잊고 있던 변월룡을 다시 찾아낸 것은 집념의 미술평론가 문영대(56)씨였고, 이번 전시는 그가 20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이뤄낸 것이었다.

 
기사 이미지

유홍준
미술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장은“변월룡은 해방 이후 단절한 한국미술사의 공백기를 채워주는 작가”라고 평했는데 나는 더 나아가 변월룡은 미국에서 활동한 백남준, 프랑스의 이응노와 동등하게 대서특필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전시회가 닷새 후 끝난다. 연휴에 많은 분들이 이 기념비적 전시회에 가보길 원하며 이 글을 썼다.

유홍준 미술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