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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당신을 기다리며

중앙일보 2016.05.03 00:40 종합 28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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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임
화가·삼육대 교수

오월의 숲은 열 살배기 소년 같다. 보드라운 연둣빛을 머금고 여름을 이겨낼 단단한 초록색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나는 인생의 어떤 계절을 맞고 있는 것일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을 빚지기보다
지금 내 아이의 꿈과 고민을 함께 나누는 게 훨씬 중요해


가정의 달 오월을 맞아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한 폭의 그림이 눈앞에 펼쳐진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신으로 학업과 생의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활동한 대니얼 리지웨이 나이트(1839~1924)의 ‘기다림(Awaiting the Return)’이라는 수채화 작품이다. 그는 주로 따스하고 화사한 목가적인 그림을 그리는 작가다. 그의 작품은 파리 근교 센강의 어느 마을에서 자연과 꽃, 달빛과 여인들의 모습 등을 행복하고 화사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의 따스하고 정감 있는 밝은 그림 중에 유독 외로움과 쓸쓸함이 감도는 그림이 이것이다. 한 여인이 강가 풀밭 위에 털썩 주저앉아 붉은 겉옷을 곁에 널브러뜨리고 강 건너를 주시하고 있다. 그리운 누군가를 넋을 놓고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하늘마저 어둡게 구름이 깔려 있어 기다리는 여인의 우울한 마음을 잘 표현해 준다.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외로움이 배어 있는 이 그림은 나의 어린 시절, 귀가가 늦은 부모님을 기다리는 풍경과 중첩된다. 그 당시 잘 안 팔리는 추상화를 그리는 미대 교수 아버지와 여기저기 대학 강의와 미술학원을 하시며 생계를 꾸려오신 억척 어머니, 그 두 분의 삶은 너무도 바쁘셨다. 그래서 나와 형제들은 일하는 아주머니와 나름 자율적인(일명 방목)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어린 시절의 밤은 왜 그리 길고 어두운지 저녁을 먹고 한참을 지루하게 기다림의 시간을 맞이한다. 아홉 살 수심 깊은 나는 비가 내리는 창 밖으로 시선이 고정되었다. ‘언제 오시려나…’ 멈춰서는 택시마다 이층에서 내려다보며 한숨 짓던 어린 나의 모습이 아스라하다.

대를 이어 ‘기다림’을 물려주는가? 워킹맘인 나도 나의 자식들에게 ‘기다림’이라는 인내심을 갖게 한다. 사춘기를 벗어난 18세 딸은 가끔 어릴 적 서운했던 점들을 나열한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이랬더라 저랬더라’는 기억을 늘어놓기 바쁘다. 나름 열심을 다해 딸을 키운 나는 좀 억울하다. 기억과 진실은 차이가 있기 마련이지만 해명하자니 좀 구차하다. 딸이 지금의 내 나이가 되어야 ‘여자의 삶’과 ‘일하는 엄마’에 대해 이해할 수 있으려나.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추억이 지금까지 함께한 어머니보다 만족스러운 ‘공유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 놀랍다. 44년을 함께한 지극 정성의 어머니보다 16년을 채우지 못한 아버지와 사랑의 충족지수가 더 높은 이유는 왜일까? 미완의 부정(父情) 때문일까?

3년 동안 암투병을 하시던 아버지의 곁에서 단둘이 마주하며 밥을 나누던 기억이 많다. 어머니는 상대적으로 무척 바쁘셨다. 대학 강의와 작품활동에 아버지 암투병 수발까지 눈물겨운 시간을 보내셨으리라 생각한다. 무엇이 어머니와 채우지 못한 여백을 아쉽게 하는가. 그것은 양적 시간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아버지와는 단둘이 독대한 시간이 켜켜이 쌓여 기억의 공유가 일어난 것이다. 질적 시간의 충족도도 높았던 것 같다. 자녀가 건강하게 성장하는 조건은 안정적인 세상을 탐색할 수 있도록 세상과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아버지는 나의 꿈을 살펴보고 구체적인 안내자 역할을 하셨다. 질적 시간을 논하자면 비단 워킹맘의 고충만은 아닐 것이다. 비록 함께 나누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해도 공감의 질적 교차 부분을 충분히 활용하자. 함께 단둘이 식사를 하며 아이의 눈을 보고 눈동자에 스치는 감정의 모습을 읽어 보자. 아이가 여럿일 경우에는 각각의 아이들과 독대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부모들은 더 좋은 환경과 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해 아이들과 함께할 현재의 시간을 빚지고 있다. 그렇게 미래에만 가치를 두기보다 현재 아이들의 마음과 교감하자. 내가 어릴 적 내 어머니의 나이가 되고 보니 더욱 그렇다. 나중에 아이들이 필요로 하고 기다리는 시간을 줄여주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기 전에 지금 내 아이의 꿈과 고민을 함께 나누기를 희망해 본다.

하태임 화가·삼육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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