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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빚보증 섰다가 1조원 넘게 물린 신보

중앙일보 2016.05.03 00:01 경제 2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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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보증기금은 지난 3월 말 현대상선의 조건부 자율협약에 참여했다. 현대상선 회사채를 기초자산으로 발행한 4675억원 어치의 프라이머리 유동화증권(P-CBO)에 신보가 지급보증을 섰기 때문이다. P-CBO를 보유한 투자자가 만기에 원금을 돌려받지 못하면 신보가 대신 갚아야 하는 구조다.

정부, 3년 전 신속인수제 오판
대상 5곳 중 3곳 구조조정 필요
신보, 현대상선 자율협약 동참
한진해운 또 신청하자 “못하겠다”
“정작 도움 필요한 중기 피해 봐”


이 때문에 채권단은 P-CBO를 일종의 대출금으로 보고 신보의 참여를 요청했다. 신보도 채권단의 설득을 받아들여 자율협약에 동참해 채무를 조정하기로 했다. P-CBO는 여러 기업의 회사채를 기초자산으로 특수목적회사(SPC)가 발행한 유동화 증권이다. 신보 보증을 통해 신용도를 높여 기관투자자에게 판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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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 뒤 한진해운이 조건부 자율협약을 신청하자 신보는 “참여를 못 하겠다”고 밝혔다. 신보는 한진해운 회사채를 기초자산으로 한 P-CBO(4306억원)에 대해서도 지급보증을 한 상태였다. 참여 거부 이유는 “P-CBO는 기초자산이 회사채이기 때문에 이를 보유한 신보는 은행 중심 채권단이 아니라 사채권자로 분류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불과 한 달 새 P-CBO 보증이 대출금에서 회사채로 바뀐 셈이다.

시장에서는 한진해운이 현대증권 매각대금을 틀어쥔 현대상선보다 유동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신보가 추가자금 지원 부담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는 중소기업 보증 전문기관인 신보가 정체성에 맞지 않게 대기업을 지원했을 때 어떤 혼란이 생기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신보가 보유한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의 P-CBO 보증잔액은 총 8981억원이다. 두 회사가 회사채를 상환하지 못하면 내년 5월~2018년 12월 만기가 돌아오는 특수목적회사의 P-CBO도 연쇄 부도가 난다. 이렇게 되면 기관투자가가 떼인 돈은 고스란히 신보가 갚아줘야 한다.

신보가 본래 설립 취지와 달리 대기업을 지원한 건 정부가 2013년 시행한 회사채 신속인수제 때문이다. 현대그룹 계열사 구조조정을 지원하기 위해 2001년 처음 시행된 이 제도는 미국 양적완화 축소 우려로 회사채 시장이 얼어붙자 12년 만에 부활됐다. 일시적 자금난을 겪는 기업이 새로 발행하는 회사채를 산업은행이 사들여 자금 순환을 돕는 제도다.

산은이 신규 회사채를 사 주면 해당 기업은 그 돈으로 기존 회사채를 갚는(차환) 방식이다. 회사채 상환액의 80%를 산은이 인수한 뒤 이 금액의 60%를 신보가 보증하고 나머지 40%는 채권은행(30%)과 금융투자업계(10%)가 나눠서 인수한다.

당시 정부가 회사채 신속인수제의 우선 지원 대상으로 삼은 기업은 현대상선·한진해운·동부제철·한라·대성산업 등 5곳이다. 회사채 신용도는 높지 않지만 향후 경영 정상화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 기업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 중 3곳이 구조조정 대상이 됐다. 동부제철은 기업구조개선작업(워크아웃)에 들어갔고,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은 용선료(선박 임대 비용) 인하와 사채권자 채무재조정에 실패할 경우 법정관리를 감수해야 할 처지가 됐다. 3년 전 정부의 예측이 실패했다는 얘기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부담 때문에 신보의 중소기업 지원 여력이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신보가 구조조정 기업에 보증을 선 돈을 갚느라 재무구조가 악화하면 정작 보증이 필요한 중소기업은 필요한 만큼 도움을 못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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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도 한진해운 자율협약을 거부하며 “과도한 채무 조정을 하면 신보의 주력 사업인 중소기업 지원이 위축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다 동부제철에 물린 P-CBO(1853억원)를 합치면 신보의 잠재 부실이 1조834억원으로 늘어난다.

전문가들은 신보가 한진해운·현대상선 자율협약을 두고 벌인 혼선이 국내 구조조정의 문제점이 집약된 사례라고 지적한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무역학과 교수)은 “그간 우리 사회의 부실기업 처리 메커니즘이 얼마나 오작동했는지를 보여준 결과”라고 비판했다.

강경훈 동국대 경영학부 교수는 “중소기업이 아닌 대기업 회사채를 정부가 보증해 준 것은 큰 문제”라고 말했다. 김상조 교수는 “중장기적으로 구조조정은 국책은행이나 보증기관 중심의 관치금융이 아닌 사모펀드·인수합병(M&A)펀드 등의 모험자본이 주도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한편 채권단은 4일 회의를 열어 한진해운의 자율협약 개시 여부를 결정한다. 용선료 인하 협상과 사채권자 채무재조정 협상의 성공을 전제로 은행대출 만기를 연장해 주는 내용이다.
 
◆회사채 신속인수제=일시적 자금난을 겪는 기업을 돕기 위해 기업의 신규 발행 회사채를 곧바로 산업은행이 인수해 주는 제도. 주로 신용도가 낮지만 회복 가능성이 큰 기업이 지원 대상이다. 기업은 산은에서 받은 자금으로 만기가 돌아온 회사채를 상환한다. 2001년 경영난에 빠진 하이닉스 등을 지원하기 위해 처음으로 1년간 한시 도입했다. 이후 2013년 회사채 시장의 경색을 풀어주기 위해 다시 시행했다.

◆프라이머리(P)-CBO=회사채 신속인수제를 통해 산업은행이 인수한 여러 기업의 회사채를 담보로 발행하는 유동화 증권. 신보가 원금에 대해 보증을 서기 때문에 원래 각 기업의 회사채보다 신용도가 높아진다. 이 때문에 기관투자가의 수요가 많다.

이태경 기자 uni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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