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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우울한 학벌사회의 종언

중앙일보 2016.05.02 00:40 종합 31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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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논설위원

과거 영국 신문 ‘더 타임스’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케임브리지대 졸업생들을 성적에 따라 5등급으로 나눈 뒤 실명을 박은 기사가 나온 게 아닌가. 사생활 중시 풍토로 이젠 케임브리지대가 유일한 성적 공개 대학이 됐지만 얼마 전까지 모든 영국 대학이 이 전통을 지켰다.

이전엔 개인별 석차를, 그것도 본인에게 알리기도 전에 공개했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한다”는 비판에 성적은 5등급으로, 공개 시기도 본인 통보 후로 바꿨다. 물론 학생들은 성적 공개에 결사반대다. 그럼에도 “면학에 도움이 될뿐더러 학사 학위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려면 개인별 성취도도 공개돼야 한다”는 주장이 반대를 눌렀다. 영국에는 졸업생 넥타이라는 것도 있다. 출신 학교의 상징으로 취직 면접 때 맨다. 굳이 학력을 안 밝혀도 시험관들은 넥타이만 보고도 출신 학교를 알아차린다. 이런 학벌사회가 없다.

한국만 유별난 학벌사회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일본·중국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컨설팅회사 등은 아이비리그 출신 아니면 어림도 없다. 압도적인 명문대가 없다는 독일에서도 분야별 최고 학교는 존재한다.

명문대 출신이라고 모든 혜택이 돌아가는 건 옳지 않다. 하지만 학력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것도 잘못이다. 평균적으로 좋은 학교 출신일수록 업무 성과가 뛰어나다는 건 객관적 사실이다. 미 대기업 임원 중 아이비리그 출신의 연봉은 타 대학 졸업자보다 24.4% 높다고 한다. 업무 성과와 연봉이 연동되는 나라가 미국이다.

아시아의 성공 비결을 논할 때 ‘실력주의(meritocracy)’ 전통을 꼽는 이가 많다. 세습 신분 없이도 개인 능력으로 성공할 수 있는 사회였기에 발전이 가능했다는 거다. 특히 과거제가 시행됐던 이 땅에서는 누구든 이 시험에 합격만 하면 출세길이 열렸고 이 전통은 고시로 이어졌다.

최근 학벌사회 청산을 추구해온 시민단체 ‘학벌 없는 사회’가 자진해산 했다고 한다. 목적이 달성돼 해산했으면 좋으련만 그 배경이 기가 막힌다. “명문대 출신도 직장을 못 잡는 등 학벌조차 자본 앞에서는 무력한 상황이라 해체하기로 했다”는 거다. 명문대 출신만 설치는 사회도 문제지만 세습 자본이 모든 걸 장악하는 세태는 더 심각하다. 그나마 명문대에 가려면 공부는 열심히 해야 하지 않나. ‘은수저’를 물고 나왔다고 좋은 직장에 권력과 명예까지 싹쓸이한다면 너무 불공평하다. 열심히 공부하면 성공한다는 최소한의 원칙마저 흔들려선 안 될 일이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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