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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라의 아이슬란드 오디세이] ⑭ 지구의 뜨거운 숨결을 느끼다

중앙일보 2016.05.02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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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바튼 호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크라플라(Krafla) 화산지대로 향했다. 크라플라 화산지대는 1724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화산폭발에 의해 형성되었다. 마지막 분화 이후 30여 년이 지났지만, 땅속 가까운 곳에서는 여전히 마그마가 들끓고 있는 활화산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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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빛 언덕들을 넘자 산과 땅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보였다. 크라플라 지대의 일부인 나마프얄(Namafjall) 화산 끝자락에 위치한 지열지대, 흐베리르(Hverir)였다. 입구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자마자 독한 유황 가스 냄새가 코를 강타했다. 유황 물질이 얼룩덜룩하게 밴 지표면은 꼭 유화 팔레트를 보는 듯했다. 온갖 색의 물감들을 짜놓고 아무렇게나 뒤섞어 놓은듯한 모양새였다.

진흙에 뒤덮인 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자 더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가뭄에 든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진 대지 바로 옆에 크고 작은 머드팟(Mudpot)이 움푹 패어있었다. 구덩이 안에는 푸른 빛깔을 띠는 걸쭉한 진흙이 꼴깍대며 끓고 있었다. 피어오르는 방울들을 보고 있자니 외계 행성의 실험실이라도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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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베리르를 한 바퀴 돌고 나니 신발에 진흙이 커다란 혹처럼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힘겹게 발걸음을 옮겨 가장 커다란 분기공으로 다가갔다. 분기공은 한껏 열이 받은 압력 밥솥처럼 소리를 내며 맹렬하게 증기를 뿜었다. 온 세상이 꿈속처럼 하얘졌다. 연기 속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검정 실루엣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무거워진 다리가 땅에서 도통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황 냄새에 머리는 어질, 정신은 몽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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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베리르의 자욱한 연기를 뒤로하고 크라플라 화산지대의 더 깊숙한 곳으로 차를 몰았다. 크라플라 지열 발전소를 지나 도착한 곳은 비티(Viti). 1724년 발생한 미바튼 대폭발로 형성된 분화구였다. 경사면을 조금 오르니 뻥 뚫린 분화구와 그 속에 담긴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청아한 푸른빛을 띠는 물빛이 마치 하늘을 담가 놓은 듯 신비로웠다. 비티는 아이슬란드어로 지옥을 뜻하는데, 그 이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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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티의 지름은 약 300m로, 둘레길을 돌며 자리를 옮길 때마다 물색이 자줏빛과 에메랄드빛으로 바뀌었다. 이곳에서 바라본 크라플라 일대는 마치 태초의 세상을 보는 것 같았다. 거칠고 척박하지만 꾸밈없이 아름다웠다. 한 시간 남짓 분화구 트레킹을 한 뒤, 레이흔유크르(Leirhnukur)라는 용암지대로 발길을 재촉했다. 크라플라 화산지대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위험한 곳으로 꼽히는 지역이었다. 입구 옆에 쓰여 있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표시된 길 이외에는 절대 들어가지 마시오.’ 무서운 경고를 가슴에 새기고 길로 들어섰다. 우락부락한 용암 평원을 지나니 푸른 벌판이 나타났다. 색색깔의 유황 자국이 덕지덕지 묻은 붉은 산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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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분 정도 걸었을까. 오르막길이 나오고 땅이 질퍽거리기 시작했다. 주변 풍경은 이전보다 더 거칠어졌다. 데크로드를 따라 걸었다. 곰팡이가 핀 것 같은 색채의 웅덩이 안에는 옥색 물이 가득 담겨있었다. 은빛 수증기를 내뿜는 모습이 괴상하고도 오묘했다. 온천을 지나 더 올라가자 데크로드가 끝나고 용암 무더기들이 펼쳐졌다. 본격적인 레이흔유크르 탐방코스에 들어온 것이었다. 간간이 꽂혀있는 나무 막대기를 보고 루트를 찾아 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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쩍쩍 갈라지고 뒤집혀 버린 땅을 헤치며 레이흔유크르의 분화구에 올랐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자마자 떠오른 단어는 ‘종말’. 말 그대로 온 세상이 까맣게 타 죽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질적이게도, 그 위로는 원색의 돌들이 굴러다니고,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색 풀들이 피어 있었다. 지각의 틈새에선 식식대는 소리와 함께 증기들이 피어올랐다. 분명 '죽음의 땅'에 가까운 모습인데 깊고 진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땅에 손을 가져다 댔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나는 지구가 살아있음을 느꼈다. 지구는 커다란 생명체였다. 나는 이 생명체의 몸통, 그러니까 가슴과 배 사이 그 어디쯤 있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가슴을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새근대는 지구의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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