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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알베르토의 문화탐구생활] 이탈리아의 진짜 삶이 궁금하다면

중앙일보 2016.05.01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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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라디오프레챠` 포스터]

한국에서 이탈리아에 대해 소개하다 보면,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이 종종 있다. 로마·피렌체 등의 관광지나 피자·파스타 등의 음식이 아닌, 이탈리아의 일상생활과 젊은 세대의 문화 같은 것들. 여행 안내서에 나오지 않는 이탈리아인의 진짜 삶 말이다. 말문이 막힐 때마다 내가 꼭 보라고 권하는 영화가 있다. 바로 루치아노 리가부에 감독의 ‘라디오프레챠’(원제 Radiofreccia, 1998)다. 내게 한국 특유의 정서를 가르쳐 준 ‘친구’(2001, 곽경택 감독)처럼 진짜 이탈리아를 느낄 수 있는 영화이자, 이탈리아에서 엄청난 흥행을 거둔 히트작이며, 무엇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탈리아 영화다.

내가 사랑한 영화 ‘라디오프레챠’

1993년 6월 20일 밤 10시, 라디오 방송국 ‘라디오프레챠’의 DJ 브루노(루치아노 페데리코)는 두 시간 후에 18주년을 맞는 이 채널을 자정 직전 종방하겠다고 통보한다. 그리고 마지막 생방송에서 그는 18년 전 자신이 직접 문을 연 이 라디오 방송국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라디오프레챠가 개국한 1975년은 보수성 짙은 이탈리아 사회에 찾아온 30년 만의 격변기였다. 부모 세대와 전혀 다른 사회적 상황에 처한 젊은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다. 그건 프레챠(스테파노 아코르시)와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시내 단골 바(Bar)에 종일 죽치고 앉아 소소한 장난이나 일삼는 시골 마을의 단조로운 나날. 갑갑한 생활에 지친 그들은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한다. 마침 이 시기 이탈리아에 독립 라디오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검열에 대한 걱정 없이 청취자와 어떤 주제로도 이야기할 수 있는 라디오. 이것은 그들에게 완벽한 자유의 도구였다. 다섯 친구들은 라디오 방송국을 개국한다. 제목은 ‘라디오랍투스’. DJ 브루노의 진행으로, 프레챠와 청춘들은 매일 밤 두 시간 동안 자유로운 방송을 만끽한다.

여기까지가 영화 ‘라디오프레챠’의 전반부다. 개봉 당시 이 영화가 더욱 주목받은 건, 시나리오 집필에 연출까지 맡은 루치아노 리가부에 감독이 이탈리아의 국민 로커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8만여 석 규모의 콘서트장이 연일 매진될 정도로 독보적인 스타다. 러브송보다 삶의 철학을 더 많이 노래했던 그는, 스크린 데뷔작 ‘라디오프레챠’에 마음속 생각들을 가감 없이 새겨 넣었다. 이 영화에는 1970~80년대 이탈리아 사람들의 진정한 생활상이 담겨 있다. 어른이 되어 가는 다섯 친구들의 모습을 이토록 현실적으로 그려 낼 수 있었던 것은, 리가부에 감독 자신이 그 시절에 20대 청춘을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감독이 뮤지션이어서 탄생한 명장면도 있다. 프레챠와 친구들은 라디오 방송 도중 할 말이 없어지면 자기가 사랑하는 노래를 한 곡씩 들려주는데, 그 선곡이 기가 막히다. 브루노의 멋진 진행에 힘입어 라디오랍투스는 조금씩 유명해진다. 그러나 행복한 순간도 잠시, 프레챠에게 고난이 닥친다. 가족과의 관계·회사 문제·실연·헤로인 중독 등으로 방황의 늪에 빠진 그는 마땅히 잘 곳이 없어 라디오 녹음실에 머문다. 그러던 어느 날 브루노가 자리를 비운 사이 프레챠는 충동적으로 방송을 시작한다.

“오늘 ‘엄친아’ 친구와 토론했다. 그는 ‘사람들이 신앙·정치 같은 기본적 가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않으면, 아무런 믿음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보님바(70년대 축구 선수 로베르토 보닌세냐의 별명)의 오버헤드 킥과 키스 리처드(록 그룹 롤링스톤즈의 기타리스트)의 리프(Riff·짧은 구절을 반복하는 연주법 또는 멜로디)를 믿는다. (중략) 내 마음속에 큰 공허가 있다고 믿는다. 로큰롤·애인들·축구 그리고 가끔 직장에서 느끼는 보람이나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그 공허감을 채워 준다고 믿는다. (중략) 믿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럼, 청취자 여러분도 이 노래 듣고 에너지를 충전하길 바란다.”

갑자기 터진 이 사건을 계기로, 라디오랍투스는 프레챠의 이름에서 따온 라디오프레챠로 제목을 바꾼다. 그리고 라디오프레챠가 열여덟 살, 그러니까 성인이 되기 전 브루노는 이 방송의 막을 내린다. 자신들의 청춘을 영원히 라디오프레챠에 간직하고 싶다는 듯이. 그래서일까. 이 영화를 보면 10대 시절의 고민과 추억들, 내가 믿었던 것들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라디오프레챠’를 자꾸 꺼내 보게 되는 이유는 또 있다. 이탈리아에서 보낸 가장 보통의 일상이 가끔은 그립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따로 약속하지 않아도 단골 바에 삼삼오오 모여 아침엔 커피 마시고 밤이면 술을 홀짝이던 날들, 나이 지긋한 바 사장님을 삶의 멘토 삼아 고민 상담하던 시간들 말이다. 현재 한국에선 유튜브를 통해 ‘라디오프레챠’의 영어 자막 버전만을 접할 수 있지만, 이 영화를 한국 관객에게 정식으로 선보여도 분명 호응이 있을 것 같다. 이참에 내가 한국어 자막을 한번 만들어 볼까. ‘라디오프레챠’로 진짜 이탈리아를 만나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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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중앙포토]


글=알베르토 몬디. 맥주와 자동차에 이어 이제는 이탈리아 문화까지 영업하는 JTBC '비정상회담' 마성의 알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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