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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의 길!] 5분 아끼려다 십년감수

중앙일보 2016.04.30 00:02 종합 25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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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
세계시민학교 교장

“목포행 열차, 곧 출발하겠습니다.”

안내 방송과 함께 기차가 떠나려는 찰나, 가까스로 열차에 한 발을 올려놓았다. 타자마자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휴우~ 객실 앞에서 허리를 꺾으며 턱까지 차오른 숨을 토해냈다. 가슴은 벌렁벌렁, 다리는 후들후들, 머리는 빙글빙글. 그러나 기차를 놓치지 않았다는 안도감으로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그랬으면 어쩔 뻔했나. 오래전에 약속한 광주 특강인데 수백 명을 허탕치게 할 뻔하지 않았나.

며칠 전에 나는 또 이런 ‘십년감수’할 짓을 하고 말았다. 나도 잘 안다. 전라도로 가는 KTX는 서울역이 아니라 용산역 출발이란 걸. 근데 그날은 너무 이른 아침이어서 그랬는지 택시 기사에게 아무 생각 없이 “서울역이요”하고는 잠시 눈을 붙였다. “다 왔습니다” 하는 소리에 또 아무 생각 없이 내렸던 거다. 내리자마자 아차, 했지만 타고 온 택시는 이미 저만큼 가버렸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출발 시간에 딱 맞춰 집에서 나왔으니 용산역에서 떠나는 기차는 놓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놓칠 때 놓치더라도 끝까지 가보기나 하자.’ 부랴부랴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운전 기사에게 빨리 가달라며 읍소와 채근을 한 뒤 세게 기도했다. 다행히 길은 막히지 않았고 신호등도 협조를 잘 해주어 출발 시간 몇 분 전 용산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에 내리자마자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뛰었고 목포행 기차가 보이는 마지막 계단은 거의 날아서 내려갔다. 그러고는 기차 문을 향해 슬라이딩, 세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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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리를 찾아 앉아서 한숨 돌리며 물 한 잔을 마시니 제정신이 들면서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사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날은 잠결에 역을 헷갈려서 그랬다지만 내게는 평소에도 약속 시간에 딱 맞춰 나가는 아주 나쁜 버릇이 있다. 이 때문에 허구한 날 늦을까봐 발을 동동 구른다. 지하철역 계단을 뛰어서 오르내리고 환승역에서도 뛰고 길거리도 마구 뛰어다닌다. 어느 때는 지하철 안이나 택시 안에서도 달리고 싶은 심정이다. 덕분에 약속 시간에 좀처럼 늦지는 않지만 약속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늘 가슴 졸인다.

친한 한의사 언니는 나를 볼 때마다 협박을 한다.

“보약을 먹으면 무슨 소용이야? 그렇게 시간 땜에 간을 졸이면 그날 먹은 보약은 꽝이라는 거 몰라서 그래?”

모를 리가 있나. 만날 듣는 잔소리인데. 그래도 못 고치는 이유는 사람들이 약속 시간에 늦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에 나도 안 늦으려고 무진 애써서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시간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이다. 특히 습관적으로 늦는 사람은 정말 딱 질색이다. 어떻게 만날 때마다 길이 막히거나 막 나오려는데 급한 일이 생기는가? 기분 좋게 만나는 자리의 첫마디가 “반가워!”가 아니라 “늦어서 미안해!”로 시작하는 자체가 나는 싫다.

잘 모르는 사람끼리는 더욱 황당하다. 얼마 전에 식구들과 동남아 패키지 여행을 갔다. 일행은 30여 명. 가이드도 좋고 날씨도 좋고 볼거리도 많았지만 같이 갔던 중년 부부 때문에 벼르고 별렀던 여행을 완전히 망칠 뻔했다. 이 부부, 제시간에 오는 법이 없다. 아침 8시에 출발한다면 8시15분쯤에야 슬슬 나타나고 자유롭게 구경하고 몇 시까지 모이라고 할 때마다 단 한 번도 시간을 지키지 않았다. 한 차 가득 사람들이 기다리는 걸 뻔히 보면서도 그러고 싶을까? 눈치만 보던 가이드가 좀 빨리 하시라니까 오히려 정색하면서 “아, 놀러 왔는데 그렇게 빡빡하게 하지 맙시다”라고 한다. 나 참, 기가 막혀서. 하여간 4박5일 내내 그 부부가 꼴 보기 싫어 죽을 뻔했다. 그래서 그 나라 역사에 대해 전문용어까지 섞어가며 아는 체를 할 때는 듣는 척도 안 했다. 같이 사진 찍자고 할 때도 마지못해 찍었고 명함을 교환하자고 할 때는 명함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 부부, 지금도 내가 왜 일행 중에서 자기들에게만 쌀쌀하게 대했는지 언짢게 생각하며 신나게 욕하고 있을 거다. (반성하시길!)

아무튼 내 문제는 약속 시간에 늦는 게 아니라 너무 딱 맞게 나오는 거다. 사람이든 기차든 기다리는 시간은 시간 낭비니까 그 시간을 어떻게든 최소화해야 한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근데 요 며칠 곰곰이 따져보니 이건 참으로 어리석은 계산, 앞으로 남는 것 같아도 뒤로는 왕창 밑지는 장사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라. 5분 아끼려고 약속 때마다 지하철에서 동동거리고 택시 뒷자리에서 신호등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아무것도 못하고 마음 졸이는 게 남는 장사인가, 아니면 5분 일찍 나와서 가는 동안 느긋하게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거나 밀렸던 카톡이나 문자에 답하며 그 시간을 알토란 같이 쓰는 게 더 남는 장사인가? 답은 너무나 뻔하다.

그러니 바로 5분이 문제다. 그 5분이 내 수명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각골명심해야 한다. 목포행 기차를 탈 때처럼 10년씩 감수하며 살다가는 목숨이 열 개라도 남아나질 않을 테니까 말이다.

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세계시민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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