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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의 시시각각] 박근혜의 위기관리 실력은

중앙일보 2016.04.28 19:00 종합 30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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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논설위원

구조조정의 칼잡이였던 이헌재는 외환위기 때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1997년 말의 위기는 무서운 풍경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시장이 무너졌다. 나라는 풍랑 속 조각배 같았다.”( 회고록 『위기를 쏘다』) 경제가 무너져서 정치가 뒤집히는 건 순식간이다. 대량 실업은 정치불안으로 직결된다. 4·13 총선에서 박근혜 정부의 참패는 막장 공천이라는 꼴불견 정치행태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아래 경기침체와 장기불황에 대책 없이 떼밀려가는 서민의 고단한 삶이 화약고처럼 깔려 있다.

폭동론까지 나오는 거제 상황
구조조정 '뜨거운 무관심'으로


박 대통령이 보고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요즘, 조선소와 협력업체가 모여 있는 부산·울산·거제·영암(대불단지)의 일부 지역엔 폭동론이 퍼지고 있다. 거제시 옥포를 취재한 기자들에 따르면 대우조선해양의 하청 근로자들의 눈에 핏발이 맺혀 있다고 한다. 그들은 “2만 명이 해고되면 폭동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있나. 이러나저러나 못살긴 마찬가지이니 확 뒤집어버릴 수 있다”는 말을 거침없이 한다는 것이다.

97년에도 폭동론이 있었다. 당시 이헌재가 작성해 김대중(DJ) 대통령 당선자에게 전달된 메모지엔 “98년 4월께 실업으로 인해 대규모 소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그 전에 노조 문제를 해결할 큰 틀을 잡아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DJ는 경제에서 민란을 감지한 이헌재의 정무적 판단을 높이 샀다. 이헌재는 비상경제대책위 기획단장에 이어 금감위원장에 임명돼 ‘대규모 소요’의 예상 경로를 선제적으로 차단했다.

DJ는 TV 생방송에 출연해 재벌·금융 구조조정을 통해 한국경제의 체질을 바꿔야 한다고 국민을 설득했다. DJ는 연립정부의 파트너였던 박태준 자민련 총재와 주례회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헌재에게 힘을 실어줬다. 박 총재는 주례회동을 하기 전에 항상 이헌재를 만났다. 국민의 의지를 하나로 모은 대통령의 정치력과 내각·청와대의 집중력, 강력한 권한을 위임받은 금감위원장의 승부수가 시장의 혼란을 정리해갔다.

정치권의 리더들은 ‘뜨거운 무관심’으로 응원했다. 이헌재는 DJ나 김종필 총리, 박태준 총재 같은 권력자들이 특정 세력을 위한 로비를 하지 않았던 점을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다. 당시 원내 1당은 한나라당이었다. 압도적인 여소야대였으나 대선에서의 패배와 외환위기를 초래한 구집권당이란 지적을 의식해 구조조정 작업에 딴지를 걸지 않았다. 민심과 리더십과 정치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20년 전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해양·조선업 위기는 체감도에선 낮을지 모르지만 파괴력에선 약하지 않다. 이 암덩어리를 정교한 수술로 깨끗이 도려낸다 해도 건설·철강·석유화학 등 공급과잉 업종이 줄줄이 응급실에 누워있기 때문이다. 거의 매년 펼쳐지는 선거, 노조 눈치 보기로 어느 정권도 손대기 싫어하던 문제였다. 폭탄 돌리기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됐다. 박 대통령은 “수술이 무섭다고 안 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으므로 구조조정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박 대통령의 경제 어젠다는 경제민주화→창조경제→규제혁파→노동개혁으로 초점이 흔들렸다. 그래서 대통령이 말만 거들지 소극적이지 않으냐는 의구심이 시장에서 고개를 들고 있다. 박 대통령의 집중력은 구조조정으로 이동해야 한다. DJ의 뜨거운 무관심 정책에서 교훈을 얻을 바가 있다. 해양·조선업에서 들어낼 건 과감하게 들어내야 한다. 대량실업은 정치권과 국민에게 호소해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선거가 끝났으니 정치환경도 호전됐다. 정치인, 정당들의 표를 의식한 압력은 줄어들 것이다. 총선에서 야당의 압승은 역설적으로 구조조정에 도움이 될 만하다. 그들은 정권교체의 희망에 부풀어 있다. 구조조정 같은 해야 하지만 인기 없는 일은 현 정부가 마무리 짓게 해주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박 대통령의 위기관리 실력은 짧게는 20대 국회가 개원하기 전까지 한 달, 길게는 대선 정국이 본격화하는 연말까지 8개월 안에 판정 날 것이다. 선거 과정에서 맺힌 한 같은 건 훌훌 털어내고 새로운 도전을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 그게 국민이 바라는 바, 대통령의 보람이다.

전영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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