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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말 먹히는 ‘트럼프 현상’ 매우 불편하지만…역설적으로 미국 민주주의가 살아있다는 방증

중앙일보 2016.04.28 02:19 종합 4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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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화당 대선 경선의 선두 주자 도널드 트럼프의 기세가 거침이 없다. 인종차별 발언을 반복하고, ‘한국·일본 핵무장 용인론’ 같은 엄청난 외교 발언을 하며, 공화당 지도부와 미 언론, 나아가 전 세계가 비난해도 그의 인기는 흔들림이 없다. 지난 19일(현지시간) 뉴욕주에서의 압승, 매직넘버(대의원 과반) 1237명의 기로인 26일 펜실베이니아 등 5개 주 경선을 싹쓸이한 것이 그걸 입증한다. 그가 공화당 대선 후보로 확정되면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 일전을 겨룰 공산이 크다. 현재로선 클린턴의 우세가 점쳐지지만 결국 ‘49대 51’의 싸움이 될 것이란 분석도 만만치 않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미국 대통령 트럼프’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트럼프 현상은 미국 민주주의의 종말을 뜻하나, 아니면 ‘신 민주주의’의 탄생으로 봐야 하나. 경제적·도덕적 붕괴로 품위·관용을 내세우던 미국 문명이 이대로 몰락의 길로 접어드는 것일까. 본지는 미국 민주주의 정치 전문가 7명에게 트럼프가 몰고 온 미 정치판의 변혁에 대해 들어봤다. 이들은 “트럼프 현상은 매우 불편하지만 민주주의의 위기는 아니다”고 진단했다.

| 민주주의의 종말인가
인간의 두려움을 기막하게 잘 이용
색다름 찾는 미국인들 분노 대표할 뿐
설령 그가 대통령 당선된다 해도
미국 민주주의 훼손하진 못할 것


◆“트럼프 현상은 일과성”=12권의 민주주의 정치론을 출간한 스티븐 슈밋 아이오와주립대 교수는 “미국의 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전통적 정치 철학’을 따르지 않는 많은 대선 후보를 봐 왔다”며 “트럼프는 그 일부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1968년 대선에서 인종차별주의자 조지 월러스가 13.5%를 얻었고, 92년 기업가 출신 로스 페로(무소속)가 18.9%를 얻었듯 유권자들이 트럼프를 찾은 것은 “늘 색다른 사람을 찾고자 하는, 분노한 미국인들을 대표할 뿐”이란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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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심리학 전문가인 엘리자베스 오소프 세인트앤셀름대 교수는 “보수·진보 모두 색다른 것에 대한 목마름이 분출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트럼프가 어떻게 하는지 한번 지켜볼까’하면서 베팅(내기)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제프리 레이먼 노터데임대 교수는 ‘트럼프 현상’이 우려되긴 하지만 미국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방증이기도 하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무엇보다 트럼프는 투표를 하지 않던 많은 이를 공화당 경선으로 새롭게 끌어들였다”고 말했다. 실제 50개 주 중 38개 주의 경선이 진행된 지난 24일 시점에서 투표자 수는 2317만 명으로, 2008년 경선 당시(1445만 명)보다 66% 증가했다. 경선 과정에서 다소의 문제가 있긴 했지만 ‘새로운 대안’에 대해 유권자가 고민하고 검증하는 기회를 줬다는 것이다.

정치 여론조사 전문가인 앤드루 스미스 뉴햄프셔대 교수는 “설령 그가 당선된다 해도 미국의 ‘견제와 균형의 원칙’에 의해 미국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일은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트럼프 인기의 핵심은 인종차별이나 과격한 정책에 있는 게 아닌 만큼 크게 걱정할 게 없다는 지적도 있었다. 민주주의저널(JD)을 창간한 민주주의 권위자 래리 다이아몬드 스탠퍼드대 교수는 “트럼프 지지자 대다수는 외국인을 혐오하고 민주주의를 부정해서가 아니라 트럼프의 자신감과 경제적 포퓰리즘에 끌리고 있다”며 “따라서 트럼프 현상을 미국의 도덕적 붕괴, 전통적 품위 및 관용의 정신 상실로 확대 해석하는 건 옳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경계를 늦춰선 안 된다는 지적도 있었다. 『케네디 50년』의 저자이자 버지니아대 정치학센터 소장인 래리 사바토 교수는 “미 정치 역사상 트럼프 같은 대통령 후보는 없었다”고 단정했다. 그는 “트럼프는 기업인으로 공화당 후보가 됐던 웬들 윌키(40년), 인종차별 전략에 나섰던 조지 월러스(68년), 초반 인기를 끌다가 추락했던 로스 페로(92년), 불법이민자에 대한 공격과 포퓰리즘으로 일관한 팻 뷰캐넌(92, 96년)과 조금씩 닮았다”며 “하지만 2016년의 트럼프만큼 (유권자의) 두려움을 기막히게 써먹으며 (민주주의 정신을) 훼손한 후보는 일찍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 새로운 민주주의인가
서민이 억만장자에 열광하는 모순
부의 집중, 정치에 넌더리 난 상황서
감성 건드린 그의 말에 복종하는 것
이런 반성 없인 또 다른 트럼프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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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현상은 노동자의 반란인가=트럼프 지지자들은 대체로 학력이 낮고 빈부격차로 좌절감을 느끼고 있는 노동자 계층으로 분석되고 있다. 서민층이 억만장자의 선동에 열광하는 아이러니다. 하지만 상당수 전문가들은 “그렇게 볼 것만도 아니다”고 주장했다. 존 포데스타 전 백악관 비서실장과 『진보의 힘』을 쓴 존 할핀 아메리칸프로그레스센터 소장은 “몇몇 엘리트들에게만 부가 쏠리는 상황에 불만이 쌓여 있는 건 (가난한 사람뿐 아니라) ‘대다수 미국인’”이라고 지적했다. 사바토 교수는 “출구 조사를 보면 저학력 노동자 계층 외에 다른 유권자로부터도 꽤 많은 지지를 얻는 걸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고학력 유권자들에게도 먹히는 건 그가 스스로 부를 쌓았고 특별한 이익(로비)단체에 휘둘리지 않기 때문”(다이아몬드 교수)이란 분석도 있었다.

하지만 경선과 대선 결과가 어떻든 트럼프가 남긴 숙제를 지적하는 전문가들이 상당수였다. 오소프 교수는 “트럼프 현상이 지나가는 열병이길 바라지만 트럼프가 진다 해도 그가 불러일으킨 에너지는 앞으로 공화당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할핀 소장은 “트럼프를 지지했던 이들의 근본적 믿음이나 태도는 트럼프가 져도 당분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선 결과에 상관없이 부의 재분배 문제를 심각하게 걱정하고 반성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많은 유권자가 우익과 좌익의 ‘트럼프식 포퓰리즘’에 쉽게 흔들릴 것”(다이아몬드 교수)이란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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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5개주 경선 휩쓸어  공화당 후보 더 가까워졌다

◆“미래 불안이 트럼프 질주 비결”=다이아몬드 교수는 “트럼프는 사람들을 속이고 있지만 그의 지지자들은 그를 믿고 싶어한다”고 표현했다. “미국이 정상에 있으며 대학 졸업장 없이 블루칼라(노동자) 직장을 가졌어도 중산층 신분을 유지할 수 있는 시대는 글로벌 시대의 도래로 불가능해졌지만 트럼프는 ‘그날들을 되돌려 주겠다’고 약속하고, 지지자들은 그걸 믿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백인이 줄고 히스패닉 등 유색인종 비율이 늘어나는) 인구구성이나 (동성결혼 인정 등) 가치관이 바뀌고 있는 미국 사회에서 자신들의 ‘위치’에 대한 염려를 토해 내고 있는 것”(할핀 소장)이란 분석과 맥을 같이한다. 스미스 교수는 “국민의 걱정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공화당 지도부와 공직자들에게 넌더리가 난 상황에서 감성을 건드린 트럼프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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