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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무릎 꿇기로 철옹성 깨뜨린 ‘악바리’

중앙선데이 2016.04.24 01:30 476호 5면 지면보기

1 전현희 당선자가 선거운동 기간 중 서울 강남구 세곡동의 노상에서 찬 바람을 맞으며 지하철역 유치 공약이 적힌 피켓을 목에 걸고 서 있다. 왼쪽 가슴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해바라기를 부착했다.

2 전 당선자의 어머니 김명순씨가 ‘전현희 엄마’라고 쓰인 점퍼 차림으로 행인들에게 명함을 돌리고 있다. 3 전 당선자는 의자에 앉은 유권자들과 눈을 맞추기 위해 꿇어앉아 인사를 나누는 선거운동을 벌여왔다. [사진 전현희 당선자]



“배지 헌터가 되지는 않겠다. 강남을 유권자를 위해 일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겠다.” 19대 총선을 한 달 앞둔 2012년 3월 19일, 서울 송파갑의 전현희 민주통합당 후보가 자진사퇴했다.


적지서 기적 일군 두 사람 전현희

비례대표로서 터를 닦아온 서울 강남을 경선에서 정동영 상임고문에게 패한 그를 민주통합당은 송파갑에 전략공천했다. 하지만 그는 ‘금배지를 사냥하기 위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지는 않겠다’며 출마를 고사한 것이다. 비록 야당엔 ‘험지(險地)’로 분류되는 지역이긴 하지만 여론조사에서 앞서 있던 초선 의원이 전략공천을 뿌리친 건 드문 일이었다. 당시엔 ‘치과의사 출신 변호사’의 배부른 투정이란 비아냥까지 들었다. 그로부터 4년 뒤 그는 정말 강남을에 다시 도전장을 던졌고 14대 총선 때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 이후 강남구에서 24년 만의 민주당 계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다 주변에선 인물 덕을 봤다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전현희(52) 당선자는 18대 때 의정생활을 함께했던 강용석 전 의원이 “전 의원과 밥을 먹으려 나이 든 의원들이 줄을 선다”고 말했을 정도로 국회에선 스타급이었다. 전 당선자의 선거운동을 도운 지지자 이상애(53)씨도 “명함을 돌리면 남자 유권자들이 굉장히 큰 관심을 보였다. 명함을 꼼꼼히 읽고 ‘TV에서 봤다’ ‘당선될 거다’며 호의적인 반응들을 보여줬다”고 웃으며 말했다. 실제로 선거기간 중 여론조사들에서 40~50대 남성층에서의 지지율이 여성·노년층에 비해 높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강남이 어떤 곳인가. 소위 새누리당의 철옹성. 이제는 웃으며 “남성 유권자들이 많이 도와주셨다”고 농담 섞어 회고하지만 야당 후보 전현희가 첫 대면한 강남을은 그야말로 철의 장막, 한겨울의 시베리아 벌판이었다.



“지역 행사를 찾아갔더니 여당 현역 의원은 축사까지 하는데 나는 소개조차 안 시켜주더라. 멀뚱멀뚱하게 앉아 있을 수도 없어서 참석자들 사이를 다니며 인사를 다니는데 뒤에서 ‘쟤 뭐야’라는 고함 소리가 들렸고 결국 쫓겨났다. 이런 서러운 대접은 난생처음 받아봤다.” 악몽과 같았던 그의 고생담은 끝이 없다. 선거사무소 앞에 현수막을 걸었는데 다음 날 찢겨 있는 일도 있었다. 전 당선자 측 관계자는 “건물 관리인이 ‘어딘가에서 압박이 들어온다’며 현수막 재설치를 허락하지 않아 다시 걸지도 못했다”고 했다.



서러움으로 선거기간 내내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다. 유권자와 악수를 나누면서도 고개 숙여 울기도 했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그러자 ‘울보’라는 별명이 따라붙었다.



강남을은 흔히들 말하는 ‘프레임 전략’이나 세련된 선거 기법이 먹힐 여지가 없는 야당의 불모지다. ‘단순 무식함’으로 정면 돌파하는 길뿐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정성을 들여야 했다. 유권자들과 항상 손을 잡고 눈을 맞추려고 했다.” 앉아 있는 유권자들과 눈을 맞추기 위해선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릎 꿇기’는 선거기간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필살기가 됐다.



해바라기는 그의 또 다른 상징이었다. ‘어차피 강남 유권자들에겐 인지도가 높지 않으니 뭔가 강렬한 느낌을 주는 소품이 필요하다’는 참모의 제안을 받아들여 큼지막한 해바라기 조화를 가슴에 달고 다녔다. 강남만을 바라보는 ‘강남바라기’가 되겠다는 의미였다. 13일 밤 당선이 확정됐을 때 당선자에게 걸어주는 꽃 목걸이도 다른 후보들과 달리 해바라기였다.



유권자 맞춤형으로 명함을 여섯 종류나 찍었다. 개포동·세곡동 등 지역별 공약이 적힌 동별 명함, 학생 자녀를 둔 기혼여성용 명함, 세례명이 적힌 성당용 명함, 장애인을 위한 점자 명함 등이다.



그는 2014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남편(김헌범 전 거창지원장)을 잃었다. 그 빈자리는 남편과 사별한 후 함께 살고 있는 팔순 노모가 채웠다. 어머니 김명순씨는 “선거운동 같은 걸 해본 적이 없어서 처음엔 ‘(딸이) 도와달라고 하면 어떡할꼬’ 했는데, 새벽부터 나가서 애쓰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같이 하게 되더라”고 말했다.



어머니 김씨는 상가·노인정 등을 돌며 하루 1000장씩 명함을 돌렸다. “‘전현희가 제 딸입니다. 명함 한번 봐주세요’ 이렇게 명함을 돌리면 ‘수고하신다’며 커피도 주시고 하더라. 문전박대 안 하고 잘 대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김씨는 전했다.



수서동에 사는 회사원 김원일(49)씨도 대형마트 정문 앞에서 명함을 돌리는 노모의 모습을 자주 봤다고 한다. 그는 “그 전엔 전 후보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는데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참 마음이 짠했다”고 했다. 이렇게 작은 변화들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선거구 내 ○○동의 주민자치위원인 김수민(가명·여)씨도 원래 골수 새누리당 지지자였다. 선거기간 동안 김씨는 전 당선자로부터 10장 넘는 명함을 받았다.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이 지역에서 이렇게 열심히 한 새누리당 후보는 본 적이 없었다. 명함을 보니 참 잘난 사람인데 여기서 저렇게 무릎 꿇어가면서 일일이 인사하고 다닌다는 게 낯설게 느껴졌다”고 김씨는 말했다.

지난 13일 밤 당선이 유력해지자 어머니 김명순(오른쪽)씨와 함께 환호하는 전현희 당선자. [뉴시스]



#시간 아깝다며 아침도 걸렀던 공부 기계 “해바라기가 왔다 갔어.” 전 당선자가 노인정에 들른 뒤엔 어르신들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오갔다. 전현희에겐 ‘제로에 가깝게 느껴졌던 당선의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지는’ 소리로 들렸다. 어느새 새누리당의 핵심 지지자들이 결집해 있는 지역 주민자치단체와 새마을 부녀회, 새마을 지도자회, 의용소방대, 자유총연맹 같은 단체 간부들의 상당수가 전 후보 지지로 돌아섰다는 얘기들이 들려 왔다. 김수민씨의 입에서도 자신도 모르게 전 후보에 대해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 전 후보를 칭찬하고 다니니 나중엔 지역에서 안면 있는 사람들이 ‘선거까지 보름만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으라’는 압력까지 들어왔다”고 했다.



혹독했던 선거운동이 끝났다. 선거 마감인 13일 오후 6시, 지상파 방송의 출구조사 결과는 48.3% 대 48.2%. 1%포인트 열세였다. 자택에서 어머니와 TV를 보던 전 당선자는 “엄마 나 못 보겠다. (개표 상황) 얘기하지 마라”며 혼자 방으로 들어갔다. “지금 이기고 있어요. 빨리 사무소로 나오세요.” 밤 11시, 보좌진의 흥분한 목소리가 전화를 통해 들려왔다. 결과는 51.5% 대 44.4%, 예상치 못한 낙승이었다.



“큰딸을 생각하면 공부하는 모습밖에 안 떠오르네요.” 어머니 김씨의 회상이다. “눈 뜨자마자 기계처럼 학교로 향했다. 시간이 아깝다며 아침도 안 먹어 항상 도시락 2개를 싸서 학교로 가 수위실에 맡기곤 했다”고 한다.



전 당선자가 부산 데레사여고를 다니던 시절 모녀는 문과와 이과 선택의 갈림길에서 충돌했다. 전 당선자는 법조인을 꿈꿨지만 “힘들게 고시 공부 하는 꼴은 못 보겠다”는 어머니의 고집도 강경했다. 결국 전 당선자는 자신의 꿈을 꺾고 이과를 선택했고 재수 끝에 서울대 치과대에 입학했다. 치과의사가 된 뒤에야 그는 사법시험에 도전했다. 대학 1학년 때 만나 결혼에 골인한 판사 남편부터 모두가 뜯어말렸지만 그의 뜻은 확고했다.



“어릴 적 꿈꾸던 법조인에 한번 도전해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으면 얼마나 후회할까라는 생각이 들어 무조건 덤벼들었다. 운 좋게 2년반 만에 합격(1996년)한 후엔 ‘최선을 다하면 못할 일이 없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최초의 치과의사 출신 변호사가 되자 정치권의 러브콜이 날아들었다. 2000년 16대 총선 때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측으로부터 영입 제안이 들어왔다. 2004년 17대 총선 때는 여야로부터 모두 제안이 왔다. 정동영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이 “추미애 민주당 의원의 지역구(서울 광진을)에 그를 자객으로 전략공천 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다 거절했다. “당시는 변호사 생활에 너무나 만족하고 있어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했다.



마음을 고쳐먹게 된 건 혈액제제로 에이즈에 집단 감염된 혈우병 환자들의 집단소송을 맡으면서였다. 가족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10년 넘게 숨기고 살아온 가족들을 설득해 거대 제약회사와 소송전을 벌였다. 전 당선자는 보건복지부와 국회 보건복지위 의원실을 돌아다니며 보상과 국정감사를 요청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2심에서 패소했다. “대법원에 상고하면서 정치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세상을 바꿀 영향력을 가진 건 결국 정치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2008년 18대 총선 때는 그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정당이 없었다. 스스로 인터넷에서 비례대표 신청서를 출력해 통합민주당을 찾았고, 결국 비례대표 7번으로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이 소송만은 물고 늘어져 결국 2013년 원고승소 취지의 대법원 파기환송 결정을 받아냈다.



#‘무릎’을 ‘무렆’이라 발음하는 경상도 여자 ‘무릎’을 ‘무렆’이라고 발음하는 경상도 사람, 통영에서 태어나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경상도를 벗어나지 않았던 그가 왜 새누리당이 아닌 민주당을 택했는지 궁금해진다. “난 항상 자신이 의미 있게 쓰여지길 원해 왔다. 나 같은 경력은 새누리당에 너무 많다. 또 나보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 정치를 하려면 야당이 맞다고 생각했다. 정체성 공격 안 받고 편하게 정치하려 했으면 새누리당으로 갔을 거다.”



굳이 강남을 선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강남은 계급과 지역 모순이 결합된 상징적 지역인데 야당에서 나서는 이가 별로 없다. 누군가는 도전해야 하는데 나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종로학원에서 재수를 하던 시절부터 사귀어 온 친구 김영희(52)씨는 “현희는 항상 자신의 생각과 신념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결정을 내려 주변 사람을 항상 놀라게 했다”고 말했다. 사법시험과 강남을 도전에 이은 소망은 무엇일까. 그는 “국민을 하늘같이, 국민만을 바라보는 정치를 실천하고 싶다”고 했다. ‘국민만 바라보는 정치’의 첫째 약속으로 그는 ‘무계파주의’를 선언했다. 계파의 이해에 얽매이는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가 흔히 손학규계로 분류되는 데 대해선 “손 대표 시절 비례대표 공천을 받았지만 18대 국회 때 어떤 계파 모임에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이충형 기자 adch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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