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죽는 날까지 일 밖에 몰랐던 런비스

중앙선데이 2016.04.24 00:30 476호 28면 지면보기

1 런비스의 염을 마친 4명의 중공 서기. 마오쩌둥(앞줄 왼쪽에서 둘째), 주더(오른쪽에서 셋째), 류사오치(마오 뒤 왼쪽), 저우언라이(오른쪽에서 둘째). 너나 할 것 없이 침통한 모습이다. 1950년 10월 28일, 베이징.



베이징 입성 후 중공은 변했다. 환경이 변하고, 임무가 변하자 사람도 변했다. 런비스(任弼時·임필시)는 예외였다. 여전히 일 적게 하고, 쓸데없는 일거리 만들고, 돈 많이 쓰는 것을 두려워했다.


사진과 함께 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75-

중공 중앙은 한동안 베이징 교외 샹산(香山)에 머물렀다. 샹산에서 베이징 시내 까지는 약 25㎞ 내외. 일 보러 나가려면 차가 필요했다.



스탈린이 5대 서기에게 승용차를 한 대씩 보냈다. 런비스는 5대 서기 중 건강이 제일 안 좋았다. 전용차량을 제일 먼저 배정했다. 런비스의 경호원들이 비슷한 회고를 남겼다. “런비스는 다 낡아빠진 차를 타고 다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시동이 꺼졌다. 소식을 접하자 다들 들떴다. 벙글거리며 차를 수령하러 가겠다고 보고했다. 런비스는 우리를 저지했다. 나는 시내에 나갈 일도 없다. 더 필요한 동지들이 타고 다니게 해라.”



런비스는 당 내에 차가 늘어나자 기름 걱정부터 해댔다. “기름값이 비싸다. 오늘부터 시내에 나갈 때는 한 번에 일을 처리하고 와라. 한 가지 일로 두 번, 세 번 들락거리지 마라.”



예외도 있었다. 비서의 회고를 소개한다. “오밤중에 만삭의 요리사 부인이 온몸을 뒤틀며 통증을 호소했다. 빨리 입원 시키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았다. 차를 쓰려면 런비스 동지의 허락이 필요했다. 달려가 보니 수면제를 먹고 잠든 후였다. 임시로 3륜차 한대를 빌렸다. 털털거리며 산부인과에 갔다.” 다음날, 간밤의 일을 안 런비스는 화를 냈다. “꼭 필요할 때 사용 못하는 너희들은 기계지 사람이 아니다. 길에서 애가 태어났으면 어쩔 뻔 했느냐?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어찌나 화를 내는지 다들 식은 땀을 흘렸다.”



당 중앙이 베이징으로 옮긴 후 런비스는 남들처럼 중난하이(中南海)에 입주하지 않았다. 이유가 분명했다. “황제가 살던 곳에 살려고 혁명을 하지 않았다. 군중과 접촉할 기회가 없어진다.” 시내 한복판에 적당한 집이 있었다. 교통은 편했지만 소음이 말도 못할 정도였다. 심장병과 고혈압에 시달리던 런비스는 안정이 필요했다. 걱정하는 사람들을 달랬다. “눈 덮인 산을 기어오르고, 거리에서 숙박한 시절이 엊그제 같다. 지금은 편안한 방에서 생활한다. 불편할 이유가 없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측근들에게 지시했다. “런비스 동지의 신분에 맞는 집을 구해라.” 조용한 골목에 군 기관이 사용하는 적당한 집이 있었다. 런비스는 사양했다. “우리 가족 살기 위해 정부 기관을 옮기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이 집을 한 채 사라고 했을 때도 손사래를 쳤다. “돈도 많이 들고, 이사하려면 번거롭다. 시끄럽긴 하지만 총소리보다 정겹고, 산책하기도 편하다.” 수리도 못하게 했다. “집 치장에 돈 들일 필요 없다. 조직과 동지들에게 일거리만 더할 뿐이다. 비도 새지 않고, 외풍도 없다.” 런비스는 죽는 날까지 거처를 옮기지 않았다.

2모스크바 교외와 흑해 연안에서 요양을 마치고 귀국한 런비스(왼쪽)를 맞이하는 주더. 뒤에 원수 녜룽전의 모습도 보인다. 1950년 5월 28일, 베이징 첸먼(前門) 기차역. [사진 김명호]



1949년 4월 신민주주의 청년단 전국 대표자 대회가 베이징에서 열렸다. 런비스가 당 중앙을 대표해 정치 보고를 했다. 참석자들은 런비스의 건강상태를 알고 있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그치지 않았다. 직접 작성한 원고를 읽어 내려가던 런비스는 체력을 부지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후반부를 대독했다. 청년 대표들은 들것에 실려나가는 런비스를 통곡으로 배웅했다.



중앙서기처는 긴급회의를 열었다. 런비스의 휴양을 의결했다. 마오쩌둥이 금붕어와 서신을 보냈다. “아무도 못 가게 했다. 일을 손에 놓고 금붕어 보며 노닐어라. 건강을 되찾는 날 내가 제일 먼저 달려가마.”



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신중국 개국 선포식이 열렸다. 런비스는 의사의 권유로 참석하지 못했다. 중계방송 들으며 부인 천충잉(陳琮英·진종영)에게 감회를 털어놨다. 난생 처음 힘들다는 말을 입에 올렸다. “승리하기까지 정말 힘들었다. 희생당한 동지들이 생각난다.” 그날 밤, 비서와 경호원, 운전병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나 때문에 너희들까지 개국대전을 참관하지 못했다. 내가 피아노 칠 테니 노래나 부르자.”



그해 12월 런비스는 모스크바 크렘린궁 병원으로 후송됐다.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회진 온 크렘린 궁 의사들이 런비스를 진단했다. 성한 데가 한 곳도 없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도움을 청했다. 스탈린이 동의하자 저우언라이와 함께 런비스를 찾아갔다.



크렘린 궁의 명의들은 런비스에게 정성을 다했다. 12월 하순, 소련에 온 마오쩌둥이 런비스가 있는 요양원을 방문했다. 두 사람은 별 말을 나누지 않았다. 서로 웃기만 하다 헤어졌다.



치료를 마치고 귀국한 런비스는 오금이 쑤셨다. 마오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 조직과 공청 관련 일을 하고 싶다.” 마오는 거절하지 않았다. “조건이 있다. 하루에 4시간 이상은 허락할 수 없다.”



런비스는 한번 일을 시작하면 온종일 매달리는 성격이었다. 4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런비스는 성실하고 모범적인 직업 혁명가였다. 염(殮)도 마오쩌둥, 류사오치(劉少奇·유소기), 주더(朱德·주덕), 저우언라이가 직접 했다.



 



김명호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