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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 저장고

중앙선데이 2016.04.24 00:12 476호 34면 지면보기
입이 무거운 자 그에게서 쪽지가 왔다. 그는 가장 늦게까지 사무실을 지키고 또 아침이면 누구보다 먼저 와서 근무하는 직원이다. 어쩌면 아예 퇴근도 하지 않고 밤을 새면서 일하는지도 모르겠다. 부서는 다르지만 가끔 그의 자리를 지날 때면 언제나 그가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는 체격이 크고 입이 무겁다. 포용력이 좋아서 웬만한 것들은 다 받아들인다. 딱 잘라 거절을 못하는 성품이라 회사생활에서 늘 손해를 본다. 불평도 하고 화도 내면 차라리 보는 사람이 덜 답답할 텐데. 동료들이 모두 퇴근한 후에도 혼자 남아 다른 부서에서 맡긴 온갖 일을 끌어안고 끙끙대는 것이다.


김상득의 행복어사전

그는 무리해서 일하고 있다. 반듯하고 단정해서 겉으로 볼 때는 멀쩡한 것 같지만 속은 다 상하고 썩었다. 언젠가 퇴근했다가 책상 위에 두고 온 휴대전화기를 찾으러 밤늦게 사무실에 들렀을 때 아무도 없는 컴컴한 자리에서 불도 켜지 않은 채 혼자 웅웅 울고 있는 그를 본 적이 있다. 혹시 그가 무안해하고 당황할까 봐 전화기만 찾아 나왔지만 그를 볼 때면 그 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에겐 휴식과 안정이 필요하다. 그는 위험하다.



11층의 탕비실 냉장고결국 그에게서 쪽지가 왔다. 저는 11층에서 여러분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냉장고입니다. 아무래도 제가 곧 여러분과 헤어질 것 같습니다. 주신 사랑이 너무 많아서, 주시기만 하고 가져가지는 않아서 도저히 제가 그것들을 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안 하던 실수도 잦고 깜빡깜빡 정신을 놓기도 한답니다. 이젠 저도 늙고 지쳤나 봅니다. 며칠 전에는 병원신세도 졌지요. 이러다간 제 명에 못산다고 하더군요. 부디 저를 가엾게 여기시어 제게 주신 것들을 모두 가져가 주세요.



사실은 동료 한 분이 냉장고를 의인화해서 보낸 쪽지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랬다. 여름을 대비해 냉장고 속 오래된 물품들을 정리하려고 한다. 개별 보관하는 물건들은 토요일까지 집으로 가져가길 바란다. 그 후에는 버리겠다. 도시락 반찬은 당일 저장, 당일 출고를 원칙으로 한다. 부득이한 경우 부서·이름·입고일·출고일을 기록하되 저장기간은 3일 이내로 제한한다.



공용으로 사용하는 탕비실 냉장고가 오래된 음식들로 꽉 차고 냄새도 고약해 참다 못한 두 매니저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냉장고를 청소하다 보니 1년 전 음식은 최근이고 10년도 더 지난 것들도 나왔다고, 잘하면 쥐라기시대 브라키오사우르스가 먹다 넣어둔 나뭇잎 화석도 나올 것 같았다고 한다.



맨 인 블랙사무실뿐 아니라 세상의 거의 모든 냉장고는 꽉 차 있다. 왜 냉장고는 항상 과적일까?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기억과 관련이 있다. 건망증 일화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물건 중 하나는 냉장고가 아닌가. 건망증 심한 사람들이 휴대전화기나 지갑을 넣어두는 곳은 언제나 냉장고다.



어떤 물건이든 냉장고에 들어가는 순간 그것들은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진다. 냉장고는 영화 ‘맨 인 블랙’에 나오는 기억제거장치인 ‘뉴럴라이저’인 걸까? 냉장고 문을 열면 우리가 잊어버린 것들이, 망각이 꽉꽉 채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지만 문을 닫는 순간 우리가 본 모든 기억을 망각한다. 냉장고는 망각을 저장하는 곳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환영사 망각이라면 제임스 샤피로의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모험』에 나오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환영사가 떠오른다. 샤피로는 17세기의 전기작가인 존 오브리를 인용해 옥스포드에 관한 일화를 들려준다.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허리를 낮게 숙이다가 실수로 방귀를 뀐 옥스포드 백작은 너무 창피한 나머지 7년이나 여행을 떠났다. 그가 돌아오자 엘리자베스 여왕은 귀국을 환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백작, 내 그대의 방귀는 이미 잊었소.”



여왕은 정말 백작의 방귀를 잊었을까? 우리가 하는 말은 종종 그 말의 겉과 정반대의 내면을 드러낸다. 여왕의 말은 그것이 진심에서 나온 말이라 하더라도 사실은 7년 동안 한 순간도 잊지 못했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존재의 이유이제 사무실 냉장고는 깨끗해졌다. 백작의 방귀 같은 고약한 냄새도 사라졌다. 너무 깨끗해진 냉장고에는 아무것도 없다. 일주일째 텅 비어있다. 드디어 망각마저도 사라진 것이다.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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