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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요약 (41)

중앙선데이 2016.04.24 00:03 476호 1면 지면보기

경기도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광릉.정희왕후 윤씨는 장손 월산군을 제치고 한명회의 사위 자산군을 예종의 후사로 결정했다. 사진가 권태균



부왕 세조로부터 공신 집단이란 부채를 물려받은 예종은 즉위하자마자 공신들의 특권을 타파한 정상적인 왕조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예종은 즉위 초부터 분경 금지, 대납 금지, 면책특권 제한 등 공신들을 겨냥한 각종 개혁 조치를 쏟아 냈다.


[수험생과 부모가 함께 보는 NIE] -41- 절반의 성공 - 성종②

예종의 개혁 정치는 공신들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했다. 예종이 재위 1년2개월 만에 열아홉의 나이로 급서한 것은 반발의 강도를 말해 주는 것에 불과했다. 죽으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예종은 재위 1년(1469) 11월 28일 진시(辰時:오전 7~9시)에 사망했다. 그 날짜 『예종실록』은 “신숙주·한명회·구치관·최항·조석문과 영의정 홍윤성, 좌의정 윤자운, 우의정 김국광 등이 승정원에 모였다”고 전하고 있다.?이때는 예종의 사망 사실이 공표되기 전으로 좌의정 윤자운을 제외하고 모두 원상(院相)들이었다. 이들이 승정원에 모이기 전에 『예종실록』은 ‘승지 및 전·현직 정승과 의정부·육조의 당상관이 (예종에게) 문안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들 중 여덟 명만 선별적으로 승정원에 모인 것이었다. 이들이 사알(司謁:내시)에 의해 사정전(思政殿)으로 안내된 직후 승전(承傳) 환관 안중경(安仲敬)이 울면서 “성상께서 훙(薨)하셨다”고 예종의 죽음을 알렸다. 신숙주는 곧 “국가의 큰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주상(主喪)은 불가불 일찍 결정해야 한다”고 차기 임금 결정 문제를 거론했다.



차기 국왕 결정의 열쇠는 세조 비 정희 왕후 윤씨가 쥐고 있었다. 정희 왕후는 사위 정현조와 도승지 권감을 시켜 대신들에게 “누가 주상자(主喪者)로서 좋겠느냐?”라고 물어 이미 관심사는 예종의 후사임을 나타냈다. 대신들은 “원컨대 전교를 듣고자 합니다”고 정희 왕후에게 발표를 미뤘고 정희 왕후는 사위 정현조를 통해 차기 국왕을 발표했다.?



“이제 원자(元子)가 바야흐로 어리고, 또 월산군(月山君)은 어려서부터 병에 걸렸다. 자을산군(者乙山君=자산군)이 비록 어리기는 하나 세조께서 일찍이 그 기국과 도량을 칭찬하여 태조에 비했으니 그를 주상(主喪)으로 삼는 것이 어떠한가?”?



원래는 예종의 장자 제안 대군이나 세조의 장손 월산군이 후사가 돼야 했다. 뜻밖의 조치였으나 대신들은 찬동했다. 정희 왕후는 월산군이 어려서부터 병에 걸렸다고 말했지만 세조 10년(1464) 월산군은 임금과 사장(射場)에 가서 활을 쏜 기록이 있고, 세조 12년(1466)에도 세자였던 예종과 동교(東郊)에서 사냥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거짓이었다. 세조가 자을산군을 더 사랑했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세조는 장손 월산군의 혼인 행차 때는 사복시(司僕寺) 담 밑에 높은 비루(飛樓)를 만들어 정희 왕후와 함께 구경했으나 자을산군의 혼인 때는 그러지 않았다. 세조가 자을산군을 태조와 비교했다는 말도 『세조실록』에는 나오지 않다가 100년 정도 후대의 인물인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등에 나올 뿐이다.? 월산군과 자을산군의 운명을 가른 것은 장인들이었다. 월산군의 장인 박중선은 신공신인 적개공신 출신으로, 한명회를 주축으로 하는 구공신과 갈등 관계에 있었다. 구공신은 신공신 세력의 사위를 왕으로 삼을 생각이 없었다. 신숙주가 사관의 눈을 피해 뒤뜰에 나가 후속 대책을 논의했던 것 자체가 무리한 후사 책봉임을 말해 준다. 후속 대책은 무엇이었을까? 도승지 권감은 대신들과 의논한 뒤 “당일 즉위하고 교서를 반포해 백성에게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문종은 세종 사후 엿새 후, 단종은 문종 사후 나흘 후 즉위했는데 성종은 당일 즉위해야 한다는 뜻이다. 국왕의 즉위식은 간단한 절차가 아니었다. 뜻밖에 급서한 예종의 장례식 준비만 해도 조정은 날벼락 맞은 것처럼 경황이 없어야 했다.?그러나 승정원에 모인 대신들은 이 모든 일이 일어날 줄 미리 알았다는 듯 태연하게 후속 절차를 진행했다.



하지만 자을산군을 모셔 오는 과정에서 착오가 생겼다. 『성종실록』 즉위년 11월 28일자는 “위사(衛士)를 보내어 자산군(者山君)을 맞이하려고 했는데, 미처 아뢰기 전에 자산군이 이미 부름을 받고서 대궐 안에 들어왔다”고 전하고 있다. 조정에서 국왕으로 결정됐음을 통보하기 전 자신이 국왕으로 결정될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궁중 세력의 대표인 정희 왕후와 공신 세력의 대표인 한명회·신숙주·정인지 사이의 사전 합의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은 예종이 죽을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당일 아침 승정원에 모였고, 정희 왕후와 새 국왕에 대해 의논하고 새 국왕 즉위 절차를 주도했다. 그래서 얼마 전만 해도 국왕이 될 줄 꿈에도 몰랐던 자산군이 예종 사망 당일 신시(申時:오후 3~5시)에 면복을 입고 근정문에서 즉위하고 교서를 반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이렇게 즉위한 성종은 재위 2년(1471) 3월, 75명의 좌리(佐理:임금이 되는 것을 도움) 공신을 책봉해 보답했다.



성종 때 사림들이 조정에 진출하면서 두 가지 현상이 발생했다. 사림들이 공신집단들의 불법과 전횡을 비판해 조정의 도덕성을 높인 반면 문치(文治) 편향에 따른 국가의 문약화(文弱化)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국왕에게 국가의 문약화 방지는 방치할 수 없는 문제였다. 성종은 사례(射禮)와 강무(講武)를 직접 주관하는 것으로 ‘무인 군주’의 모습도 보이려 했다.?

명묘조서총대시예도(明廟朝瑞蔥臺試藝圖)국왕이 서총대에 친히 나가서 활쏘기 우승자에게 말 두 필을 하사하는 내용의 그림이다. 고려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다. 사진가 권태균



사례는 서울에서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활을 쏘는 대사례(大射禮)와 지방에서 지방관이 주재하는 향사례(鄕射禮)로 나뉜다. 『논어(論語)』 팔일(八佾)편에서 공자는 “군자는 다투지 않으나 반드시 활쏘기는 그렇지 않다. 서로 읍하고 사양하며 단에 올라 활을 쏘고 내려와서 마시니 그 다툼이 군자답도다”라고 말했다. 대사례는 『의례(儀禮)』의 한 편명(篇名)일 정도로 국왕의 주요 의식 중 하나였다.? 성종은 재위 8년(1477) 8월 성균관 문묘(文廟)에서 공자 및 선현들을 제사하는 석전(釋奠)을 거행하고 명륜당에 나가 특별 과거를 보았다. 1400여 명의 거자(擧子:응시생) 중 권건(權建) 등 4명의 급제자를 선발했는데, 내구마(內廐馬:임금의 말)를 타고 유가(遊街:급제자의 가두행진)하는 행렬에 구경꾼이 수천 명에 달했다고 전하고 있다. 성종은 이때 사단(射壇)에 나가 대사례를 행했는데 화살 넉 대를 쏘아 1시(矢)를 맞혔고 월산대군과 영의정 정창손 이하 68명이 짝을 지어 쏘았는데 맞힌 자는 상을 주고 못 맞힌 자는 벌주를 내렸다.? 지방의 향사례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주석에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개성부와 주부군현(州府郡縣)에서 향사례를 행한다”고 규정돼 있지만 지방에서 실제로 행해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향사례를 향촌 사회 장악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인물이 사림 영수 김종직(金宗直)이었다. 함께 모여 활을 쏘는 향사례를 이용해 사림은 향촌 사회를 장악해 나갔다.? 그러나 사림은 국왕이 대사례 외에도 관사(觀射) 등을 통해 무예를 권장하려 하면 그것을 비판하는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 관사는 임금이 신하들의 활쏘기를 구경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임금도 직접 쏘았다. 사림이 성종의 관사를 비판하기 시작한 배경에는 무예를 천한 것으로 여겼던 사림들의 내심이 있었다. 임금은 수성(修省:마음을 가다듬어 반성함) 같은 문적(文的) 수양에 힘써야지 관사 같은 무적(武的) 유희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무예를 천시하는 고질병이 대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종은 “내가 종친과 더불어 관사하는 것은 친친(親親:친척을 친애함)을 돈독히 하고 무비(武備)를 닦으려는 것”이라면서 “송나라의 정치를 논할 때 ‘문치(文治)는 성했으나 무략(武略)은 강하지 못했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사림들이 이상으로 삼는 송나라가 무예를 천시하다가 망하지 않았느냐는 반문이었다.?하지만 성종은 사림들의 무예 천시에 대해 사상적·제도적으로 대응하는 본질적 대책보다는 관사를 계속하고 강무를 강행하는 현상적 대응에 만족했다. 성종은 공신 집단들의 불법 전횡에 적당히 타협한 것처럼 사림들의 무예 천시에도 적당히 타협했다. 사냥은 국왕의 놀이이기도 했지만 강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평화시의 군사 훈련이기도 했다. 국왕의 사냥은 임금이 전쟁에 나갔을 때를 가정해 진행되었다. 어가(御駕) 앞 교룡기(交龍旗) 밑에 초요기(招搖旗)를 세웠는데도 달려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장수들이 곤장을 맞은 것이 이를 말해준다. 성종은 강무에서 신하들을 죄준 후 이렇게 말했다.?



“내가 평일에는 대신을 예로 대우하여 죄를 주지 않으려 했지만 군문(軍門)의 일은 크므로 죄를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의원에게 치료해 주도록 하라.(『성종실록』 10년 10월 6일)” 성종은 이처럼 강무를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도 사용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성종이 두 차례 북벌을 단행한 이유 중에는 왕권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성종 10년(1479) 윤10월 명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건주여진(建州女眞:남만주 일대의 여진족)이 명나라 국경을 침범했다면서 출병을 요구했다.?



성종 22년(1491) 정월 여진족 올적합(兀狄哈) 1000여 명이 영안도(永安道:함경도) 조산보(造山堡)를 공격해 군사 3명 사살, 26명 부상의 인명 피해를 주고 물자를 노략해간 사건이 발생했다. 경흥(慶興)부사 나사종(羅嗣宗)이 두만강을 건너 추격하다가 되레 전사하자 파병론이 등장했다. 찬반 양론이 대립했으나 성종은 파병을 결정하고 허종(許琮)을 북정도원수(北征都元帥)로 삼아 두만강을 건너게 했다. 만주 강역을 영구히 점령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응징 차원의 파병은 효과가 클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었다.



군사 문제에 있어서도 성종은 근본적 해결책을 모색하기보다 현상 타개책에 만족했다. 그 결과 25년이란 짧지 않은 재위 동안 성종이 남긴 구체적 업적은 거의 없었다. 성종은 대비 윤씨와 공신집단의 합의로 왕위에 올라 현실과 적당히 싸우고 적당히 타협했다.?성종이 타협을 거부했던 거의 유일한 사건이 왕비 윤씨의 폐출과 사사(賜死)였다. 그렇게 죽인 여인의 아들 연산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 또한 그로 인해 불거질 문제에 눈 감은 일종의 타협안이었다.



- 이덕일,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52호 2010년 2월 7일, 제158호 2010년 3월 21일, 156호 2010년 3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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