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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닉죄 몰랐지? 15년 숨긴 삼국유사, 경매 내놨다 덜미

중앙일보 2016.04.22 02:24 종합 12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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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월 25일, 대전의 한 대학 한문학 교수 조모씨의 집에 30대로 추정되는 괴한 둘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문화재 13점을 훔쳐 달아났다. 도난품 중에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기이(紀異)편 1책(한 권·사진)이 포함돼 있었다. 당시 경찰이 인사동 등을 뒤지고 장물수배전단 1만 부를 배포해 가며 약 2년간 수사했지만 용의자를 가늠조차 못했다.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소유주였던 조씨는 책을 되찾지 못한 채 2014년 숨졌다.

1999년 교수 집서 강탈한 문화재
강도·장물취득 시효 만료됐지만
은닉죄는 경매 출품때 시효 시작

사라진 줄 알았던 이 목판본 『삼국유사』가 17년 만에 세상에 나타났다. 올해 1월 20일 고미술품 경매에 출품되면서였다. 경매 시작가는 3억5000만원이었다. 십수 년간 이 책을 찾아온 조씨의 딸이 이를 알고 즉각 신고했고 서울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가 수사에 착수했다.

문제는 특수강도 혐의가 2009년 1월로 공소시효(10년)가 끝났다는 것이다. 장물 알선·취득의 공소시효 7년 역시 지났다. 실제로 용의자 김모(63)씨는 “도난품인지 몰랐다”면서 “2000년 1월 대전의 한 골동품가게에서 9800만원에 책을 구입했다”고 주장했다. 모르고 취득한 경우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하지만 “구입 후 전시 등에 출품을 한 적이 있느냐”는 경찰의 끈덕진 질문에 김씨는 “15년간 단 한 번도 책을 꺼낸 적이 없다”고 말했다가 덜미가 잡혔다. 경찰은 21일 문화재청과 공조해 이 책을 은닉한 혐의(문화재보호법 위반)로 김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 관계자는 “문화재보호법상 김씨가 경매 출품을 의뢰한 지난해 11월 5일까지 은닉 행위를 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공소시효(7년)는 그날을 기준으로 보는 게 맞다”며 “정당하게 구입했다면 15년간 숨겨두고 있지만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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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조사 결과 김씨는 책을 보관하는 동안 네 차례 이사를 했는데 그때마다 인테리어업자를 불러 욕실 천장에 3.3㎡(1평) 크기의 비밀 공간을 만들었다. 그는 이곳에 오동나무 상자에 담은 책을 15년간 보관해 왔다. 경찰은 “도난 문화재는 공소시효가 지난 후에야 유통되니 문화재 관련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폐지하거나 연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삼국유사』는 고려 승려 일연이 신라·고구려·백제의 유사를 5책(권)으로 기록한 역사서다. 김씨가 가지고 있던 것은 목판본이다. 성암고서본(보물 제419-2호), 연세대 파른본(보물 제1866호)과 동일 판본으로 1512년에 인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에는 이 책의 판본 중 국보 2점과 보물 4점이 등록돼 있다.

채승기 기자 ch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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