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론] 새 다자협력체로 주목받는 유라시아 의장회의

중앙일보 2016.04.22 01:03 종합 29면 지면보기
기사 이미지

김석환
한국외대 초빙교수

지난 19일 러시아 모스크바 중심가는 하루 종일 경찰 경호 차량을 앞세운 외교 행렬들이 복잡하게 움직였다. 유라시아 주요 국가 19개국 의회 의장들이 한자리에 모인 역사적인 제1차 유라시아 의회 의장회의가 열렸기 때문이다.

이날 의장회의에는 공동 주최국인 한국과 러시아를 비롯해 중국·이란·인도네시아·베트남·카자흐스탄·아제르바이잔·필리핀·몽골·인도(옵서버) 등 19개국이 참석했다.

특히 최근 국제사회에 복귀한 이란은 유라시아 협력에서 이란의 비중을 강조하려는 듯 존재감을 부각시키려 열심이었다. 뒤늦은 결정으로 의장이 참석할 수 없어 옵서버 형식으로 참여한 인도도 “유라시아의 변화와 협력에서 인도가 뒤처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회의는 여러 측면에서 역사적이다. 우선 유라시아 주요 국가 의회 지도자들이 한국의 주도로 한자리에 모였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가 크다. 유라시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대륙이며 글로벌 정치·경제 및 문화에서 그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그만큼 주요국들의 전략적 접근과 외교적 이니셔티브도 많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유라시아 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주요국 지도자들이 모이는 다자협의체는 없었다.

상하이협력기구(SCO)·독립국가연합(CIS) 등 기존 기구들은 대부분 중국·러시아 주도거나 옛 소련권 국가들 중심이다. 이번 회의처럼 한국이 주도하고 아시아의 해양 국가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유럽에 문호를 개방한 다자협의체는 없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 회의는 대단히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측면이 있다.

 
기사 이미지
또 다른 의미는 이번 회의 참가국들의 적극적인 움직임이다. 1차 회의임에도 불구하고 참가국들은 발전의 속도를 가속화하자는 입장을 보였고 즉석에서 유라시아 의회 의장회의의 정례화에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당초 2년 단위 정례화를 계획했던 방침이 매년 진행하는 것으로 변경됐다. 또 참가국 의회 의장들은 2차 회의를 서로 주최하겠다고 나서는 등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모습은 유라시아 의회 의장회의가 행정부 중심의 구체적인 외교 협의체는 아니지만 지속 가능성을 담보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유라시아 협력의 내실화와 가속화를 위해서는 역내 국가 간 입법 및 제도 협력이 매우 중요한데 이를 담당하는 입법부 수장들의 협의체 필요성에 대해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19개국 주요 언론뿐 아니라 이날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비유라시아 국가들도 대거 현장에 전문가 및 대사관 직원들을 보내 회의의 진행과 내용을 수시로 파악하는 등 분주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동안 유라시아 공간을 놓고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러시아의 신동방정책, 한국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비롯해 일본·유럽·인도 등 주요국들이 경쟁과 협력의 모습을 보여왔다. 특히 중국은 실크로드 경제벨트를 국내 경기 침체 탈피 및 자국의 2차 국제화 개발 전략과 연동해 적극화하면서 유라시아 공간 내 협력을 주도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유라시아 공간 내 입법부 수장 회의를 성사시켰다는 것은 한국의 외교적 창의성과 소프트 파워를 국제사회에 과시한 측면이 있다. 한국은 이번 회의의 조직 및 진행, 어젠다 선정 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 유라시아 공간 내에서 발달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국가로서 존재감을 강화했다. 특히 한국 국회 스태프들은 깔끔한 조율 능력과 매너, 그리고 성실함에서 다른 참가국 모두의 모범이 돼 또 하나의 한류 경쟁력을 만들어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유라시아 협력 범위에 대한 개념의 확대다. 공동 주최국인 한국과 러시아는 이번 회의에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의 주요 국가인 베트남·태국·필리핀·캄보디아·인도네시아를 초청했다. 이들 중 일부는 유라시아 대륙과 떨어진 해양 국가지만 아세안 국가들을 하나의 동일체적 개념으로 간주해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유라시아 공간 협력의 일원이다”는 새로운 논리를 만든 것이다.

이는 중국의 유라시아 전략인 일대일로가 육상 실크로드와 해상 실크로드 모두를 아우르는 공간 전략을 추구하면서 중국의 영향력과 주도권을 확대하려는 데 대한 대응적 측면이 있다. 또한 유라시아 협력 과정에서 글로벌 표준과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에 대한 비중을 높이려는 측면도 있다.

각국의 유라시아 전략은 이제 새로운 협력과 경쟁의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그동안 유라시아 협력에서 잠시 뒤처져 있던 이란이 상설 사무국의 조속한 설치를 주장하는 등 유라시아 협력에 적극성을 보이는 것도 관심거리다. 2017년 2차 서울 회의에서는 이러한 협력과 경쟁의 모습이 더욱 가시화될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각국의 소프트 파워 경쟁도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김석환 한국외대 초빙교수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