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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는 가전이 아닌 가구 어디 놓아도 어울리게 했죠

중앙일보 2016.04.22 00:03 Week& 6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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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가구 디자이너인 에르완 부홀렉은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할 때 새로운 시각과 아이디어가 나온다”며 “때로는 사물과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고 말했다. ‘가구 같은 TV’인 삼성전자 ‘세리프 TV’ (사진 왼쪽)를 디자인했다.


삼성전자 ‘세리프 TV’ 디자인한 부홀렉

아파트 거실에는 공통점이 있다. 가장 넓은 쪽 벽엔 소파가 놓여있고, 맞은편 정중앙에는 TV가 자리 잡는다. 간혹 자녀 교육 문제로 TV를 없앤 가정도 있지만, 아직까지 우리 눈에 익숙한 구도는 이렇다. 현대인의 생활에서 때로는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TV에 대해 프랑스의 듀오 디자이너인 로낭(45)과 에르완(40) 부홀렉 형제가 도전장을 냈다. 요즘 유럽에서 ‘핫한’ 가구 디자이너로 꼽히는 부홀렉 형제의 손에서 TV는 가전의 옷을 벗고 가구로 다시 태어났다. 지난해 첫 선을 보인 삼성전자 ‘세리프 TV’ 얘기다. 최근 방한한 동생 에르완 부홀렉을 만났다. 그는 “편견없이 바라보니 새로운 세계가 열리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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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프 TV’는 책장 위에 얹으면 책 같고(사진 위), 그림 사이에 놓으면 액자 같다. [사진 두오모]



부홀렉 형제가 디자인한 ‘세리프 TV’는 TV같지 않은 TV다. 가전제품이라기보다는 가구나 오브제, 미술품 같은 인상을 준다. 테이블이나 책장 위에 올려놓으면 책과 어우러지고, 벽에 걸면 한 폭의 그림 같고, 다리를 끼워 바닥에 세우면 독립된 가구가 된다. 지난해 9월 영국 런던에서 처음 공개됐을 때, 그리고 지난 1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메종 오브제’ 전시회에 나왔을 때 이 TV에 디자인 애호가들의 관심이 쏠린 이유다. 서울 논현동에 있는 하이엔드 라이프스타일 스토어 ‘두오모’의 쇼룸에 그와 마주 앉았다.

-TV 디자인은 처음인가.

“네, 처음이에요. 20년 전 형과 함께 파리에 디자인 스튜디오를 열고 작업을 시작한 이래 줄곧 가구와 조명, 세라믹 타일, 각종 오브제 등이 대상이었어요. TV로 관심이 옮겨간 것은 자연스러운 발전 과정이었다고 봐요.”

-익숙하지 않은 TV에 도전한 이유는.

“TV는 매우 강렬한 오브제인데, 좀 더 주변 환경에 녹아들게끔 디자인해 보고 싶었어요. TV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벗어난, 개성 있는 TV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디자인의 핵심 포인트는 ‘울트라 씬’ 스크린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이었어요.”

-지금까지 TV는 ‘더 얇게, 더 크게’로 경쟁해 왔는데.

“오랜 기간 TV 회사들은 품질, 기능, 엔지니어링에 투자하며 경쟁했죠. 모두 한 가지, 얇고 넓은 걸 추구했죠. 비슷비슷한 결과물은 개성이 없잖아요. ‘검은색 플랫 스크린’은 ‘검은색 플랫 스크린’일 뿐이죠. 여느 가구처럼 마음대로 옮길 수 있고, 집안 어디에 놓아도 어울리는 TV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세리프’는 로마자로 숫자를 표기할 때 쓰이는 글자체이다. 세리프 TV는 옆에서 보면 대문자 ‘I’ 모양인데, 여기에서 세리프라는 이름이 나왔다. 스크린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넓고 평평하게 만들었다. 홍보 사진 속 세리프TV 위에 고양이가 앉아있을 정도다.

-디자인 컨셉은 어떻게 정했나.

“TV를 가전제품이 아닌 가구로 접근했어요. 지나치게 얇고 평평한 부분은 가구에는 존재하지 없잖아요. 그래서 TV에 두툼한 볼륨감을 줬죠. 아랫부분은 프레임이자 받침대이고, 윗부분은 책이나 화병, 장식품을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넓게 만들었어요. 가구라는 관점에서 TV를 보니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무엇이 보였나.

“가구는 어느 각도에서 봐도 아름답지요. 집안에서 위치를 바꾸기도 하니 옮기기 쉬워야 해요. TV 뒷면을 패브릭 패널로 덮어 지저분한 전선을 가렸더니 TV를 꼭 벽에 붙이지 않아도 되게 됐어요. 방 한가운데에 놓을 수도 있으니 공간과 좀 더 어우러지는 TV가 됐습니다.“

-기능적으로도 차별화하나.

“TV 내부의 유저 인터페이스도 직접 디자인했는데, 가장 특징적인 기능은 버추얼 커튼 모드입니다. 창문 커튼을 닫으면 순간적으로 창밖 풍경이 사라지듯, 흘러나오는 컨텐트를 일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기능이에요. 반투명한 그래픽 요소를 스크린에 띄워, TV를 완전히 끄지 않고도 화면을 가릴 수 있어요.”

-어떻게 나온 아이디어인가.

“우리가 화면을 접하는 방식이 TV에서 모바일로 옮겨오면서 원하지 않을 때 즉각 화면을 끌 수 있는 환경에 익숙해졌어요. 스마트폰 화면을 켰다 끄기를 반복하듯이 TV 화면도 그렇게 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봤어요. 축구 경기를 보는데 광고 시간이 돼서 커튼 모드를 누르면 TV를 완전히 끄지 않고도 화면에서 광고를 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구 같은 TV’ 프로젝트는 3년 전 시작됐다. 첫해는 삼성이 보내준 TV를 갖고 놀기만 했다. 차차 TV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서 본격적인 디자인 작업은 두 번째 해에 시작됐다.

-디자인할 때 가장 큰 도전은 무엇이었나.

“요즘 사람들을 큰 사이즈의 스크린 앞에 앉히는 것 자체가 도전이에요. TV를 소유하지 않는 젊은층도 많고,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TV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지요. 우리 집도 TV를 없앤 지 15년쯤 됐어요.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원할 때에 원하는 프로그램을 보는 데에 익숙해졌지요. 6살과 2살짜리 딸들도 각자 모바일기기를 보는 것을 좋아해요. 아내와 나까지 네 명이 각각 작은 화면에 얼굴을 파묻고 있을 때도 있어요. 대형 스크린의 위상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어려웠어요.”

-지금은 TV가 있나.

“아직 장만하지 않았어요. 아이들이 너무 어리다고 아내가 반대해요. 하지만 스크린이 우리 생활에서 쉽게 없어지지 않을 건 분명합니다. 디자인할 때 우리는 ‘TV’가 아닌 ‘스크린’을 생각했어요. 디자인 작업 자체는 어려움이 없었는데, 삼성의 의사 결정 구조가 더딘 게 힘들었어요. 파리 시간으로 아침이면 서울에서 오는 컨펌 전화를 기다리는 게 일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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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가까이 함께 작업해 온 에르완(사진 왼쪽)과 로낭 부홀렉 형제. [사진 두오모]



부홀렉 형제는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주 출신이다. 어린 시절 시골 집에서 뛰어놀며 자연을 통해 영감을 키웠다. 세계적 가구회사인 카펠리니, 린네로제, 해비태트, 헤이, 비트라 등과 협업해 의자와 조명 등을 출시했다. 파리, 뉴욕, 밀라노 등지의 가구 전시회에서 여러차례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2011년에는 퐁피두미술관 메츠 분관이 부홀렉 형제의 작품 전시회를 열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디자인 철학이 뭔가.

“디자인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유용한 해결책을 제안하고 효율성을 높이기도 하지요. 결국 디자인을 통해 현실 세계와 잘 만나고 싶습니다.”

-스마트폰 등 생활의 변화가 디자인에는 어떤 영향을 주나.

“몸의 자유, 편안함이 더욱 중요해질 거에요.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 우리 몸과 마음은 분리돼요. 정신은 통화 상대방에게 가 있고,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요. 걸으면서 통화하다가 주변을 보지 않고 찻길을 건널 때를 상상해 보세요. 스마트폰에 집중할 때 몸은 동물처럼 본능적으로 변해요. 고양이가 따뜻하고 부드럽고 편안한 곳을 찾듯이. 앞으로는 편안함이라는 요소에 더욱 집중할 생각이에요.“

-이번 작업을 하면서 얻은 게 있나.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가면 새로운 창이 열리게 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많이 알지 못할 때 신선한 시각이 생겨요.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눈으로 보면 실수도 있을 수 있지만 새로운 게 보이지 않나요. 혼자 있고 싶으면 테이블 밑으로 들어가고, 오줌이 마려우면 화장실에 가듯이 아이들이 더 나은 결정을 내릴 때가 많잖아요.”

-앞으로 해보고 싶은 디자인은.

“자동차를 디자인해보고 싶어요. 지금의 자동차는 한 사람, 운전자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차 안에는 운전하지 않는 나머지 세 명이 더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죠. 뭔가 새로운 것이 나올 것 같지 않나요.”



글=박현영 기자 hypark@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oh.jongta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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