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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결단하지 못하면 권력은 망한다

중앙일보 2016.04.19 19:09 종합 31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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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
논설위원

이 나라는 지도자의 결단으로 전진했다. 이승만은 한·미 동맹으로 국가를 지켜냈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로 근대화를 개척했다. 전두환·노태우는 6·29 선언으로 국가의 숨통을 열었다. 김영삼은 칼국수 개혁으로 병든 국가를 수술했다.

결단은 지도자 개인에게도 중요하다. 1992년 대선에서 패하자 김대중은 은퇴를 결단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나중에 돌아와 대통령이 됐으니 결단이 바뀌긴 했다. 하지만 일단 떠나는 결단이 없었다면 집권은 어려웠을 것이다. 노무현은 편안한 종로를 버리고 험악한 부산으로 갔다. 그런 결단이 있었기에 그는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박근혜도 결단할 때 살아났다. 불법 파업에 맞서고, 개성공단을 닫고, 친북 정당을 몰아냈을 때 그는 확고하게 섰다. 세월호가 침몰하고 메르스가 덮쳐도 국민은 그를 지켜줬다. 대통령이 항상 올바른 결단을 내릴 준비가 돼 있다고 다수 국민은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선거의 여왕은 선거의 아낙으로 추락했다. 정권은 소용돌이에 빠졌다. 그것은 결단해야 할 때 결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년 전 나는 ‘획기적인 공천제도를 제안함’이라는 칼럼을 썼다. 전국 5개 권역마다 배심원단 30명이 심사하자는 거였다. 배심원은 일반인 중에서 추첨으로 선정된다. 이들은 외부와 차단된 곳에서 엄격한 심사로 공천자를 정한다. 그러면 권력자가 끼어들 수 없다. 친박이든 비박이든 공평하게 떨어진다. 유승민 문제도 배심원단이 순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 제도라면 끔찍한 공천 파동은 없었을 것이다. 진박 마케팅도, 이한구의 칼춤도, 김무성의 옥새도, 억울한 양들의 비명도 없었을 것이다. 공정한 제도는 제치고 편의적인 권력 공천에 매달리니 정권에 지진이 터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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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권력 공천을 하려면 당당해야 했다. 유승민을 배제하면서 정면으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과를 기다리면 된다. 그런데 무슨 범죄라도 저지르는 것처럼 질질 끌었다. 나중엔 ‘말려 죽이기’ 꼼수까지 저질렀다. 이런 무(無)결단으론 국가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다. 김정은은 고사하고 김영철도 상대하지 못한다.
 
결단이 약한 건 김무성도 마찬가지다. 공정한 공천이 흔들리면 처음부터 반기(反旗)를 들어야 했다. 대표직을 걸고 권력에 충격을 줘야 했다. 혼란은 있었겠지만 결국 권력은 중심을 잡아 공정한 공천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김 대표는 막판에야 움직였다. 그나마 절반의 항명이었다. 결연함이 부족하니 잘못된 대세를 바꾸지 못했다.

반면 안철수는 결단을 해냈다. 2012년 국민 앞에 등장한 이래 안철수는 제대로 된 결단력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항상 흔들리고 물러섰다. 그러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결단을 선보였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야권연대’ 장풍으로 당을 흔들자 그는 결연히 맞섰다. “죽더라도 이 당에서 죽겠다”고 했다. 추락하던 지지율은 살아났고 그는 지금 정치판의 주역이 돼 있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 정치에 남아 있는 중요한 결단은 뭘까. 먼저 박 대통령이다. 지난 3년 동안 그에게 국민은 소통을 소리치고 애걸했다. 폐쇄적 고독에서 벗어나 세상 속으로 뛰어들라는 거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고립 속에 있다.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부속실장 하나만 데리고 있다. 퇴근 후에는 커다란 관저에서 홀로 지낸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집무공간을 개조해 비서실장·수석·비서관과 어울려야 한다. 이것이 소통의 결단이다.

다음은 불개입(不介入)의 결단이다. 박 대통령은 대선 후보를 만드는 일에 뛰어들어선 안 된다. 당의 차기 후보가 민심을 얻으려면 차별화가 불가피하다. 선거 참패로 일이 그렇게 돼 버렸다. 후보는 대통령의 공적은 계승하면서도 실패는 과감히 비판해야 할 것이다. 그걸 위해 대통령은 후보와 거리를 둬야 한다. 그리고 순교(殉敎)의 자세로 기다리는 것이다. 정권을 위해 정당한 비판이라면 어떤 돌도 맞겠다고 각오해야 한다.

새누리당도 결단을 내려야 한다. 원유철 또는 새로 뽑히는 ‘기득권 원내대표’가 어떻게 과감한 혁신을 할 수 있나. 야당처럼 여당도 개혁가를 영입해야 한다. 그래서 당을 확 뜯어고쳐야 한다. 갈등만 조장하는 최고위원제를 그대로 둘지, 새 대선 주자를 어떻게 영입할지, 웰빙 정당을 어떻게 바꿀지…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과오도 많았지만 보수정권은 그래도 국가 발전의 줄기를 지켜왔다. 20차례 총선에서 보수집권당이 제2당으로 전락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보수세력에게는 박근혜 정권에 이르러 최대 위기가 닥친 것이다. 결단 못하는 보수의 막내딸을 지켜보면서, 보수세력의 긴 탄식이 흐른다. 그 한숨에 봄꽃이 지고 있다.

김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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