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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으로] 분노 누를수록 폭발 … 행동 대신 말로 표현하는 연습 필요

중앙일보 2016.04.16 02:50 종합 17면 지면보기
미혼의 A씨(38·여·무직)는 ‘워킹맘’인 여동생 B씨의 집에 출퇴근하면서 유치원생 조카를 돌보는 대가로 생활비를 받았다. A씨는 처음에는 생활에 만족하는 듯했다. 하지만 육아에서 시작해 빨래·청소 같은 자잘한 집안일까지 동생의 요구가 점차 늘어나자 상황이 달라졌다. 어느 주말 저녁 B씨는 남편·아이와 외식을 나가면서 A씨에게 말했다. “언니, 내일 아침에 먹을 밑반찬 좀 부탁해.”

순간 A씨는 B씨의 머리채를 확 낚아챘다. “XXX아, 내가 네 하인이냐. 내가 너희 집에서 일해서 먹고산다고 나 무시하는 거야.” A씨는 욕설을 하며 B씨의 다리를 여러 차례 걷어찼다. 이후 A씨의 분노는 빈번하게 폭발해 물건을 집어던지고, 조카에게 고함을 치며 화풀이를 하기도 했다. 증상이 심해지자 B씨는 A씨를 데리고 정신과를 찾았다. 이 자리에서 A씨는 “동생이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하면 화가 너무 치밀어 올라 자제가 안 된다”고 털어놓았다.

20대 후반인 A씨(남)와 B씨(여)는 대학 캠퍼스 커플로 시작해 7년 가까이 사귀었다. 그런데 B씨가 먼저 취업에 성공하면서 둘 사이가 삐걱대기 시작했다. 취업 시험에 줄줄이 낙방해 자존심이 구겨진 A씨는 어느 날 “술 좀 그만 먹고 공부하라”는 말에 격분해 B씨에게 처음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A씨는 “다신 안 그러겠다”고 사과했지만 이후로도 폭력과 사과는 반복됐다. 결국 정신과를 찾은 A씨는 “매번 후회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간다”고 말했다.

| ‘간헐적 폭발장애’ 5년 새 33% 늘어
데이트 폭력 등 사회범죄로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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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욱’ 하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폭발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분노 조절이 안 돼 자주 과도하게 표출하는 증상을 흔히 ‘분노조절장애’라고 부른다. 정확한 병명은 ‘간헐적 폭발장애(Intermittent explosive disorder)’다. 부정적인 결과가 예측되는데도 분노를 반복적으로 과하게 분출할 때 진단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이 같은 증상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는 2009년 3720명에서 2013년 4934명으로 5년 사이 32.6%나 증가했다. 이처럼 분노조절장애가 급증하는 이유는 뭘까.

안용민 서울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사회가 복잡해지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스트레스는 커진 반면 이를 적절히 해소할 수 있는 정서적·시간적 여유가 없어졌다”며 “여기에 영화, 게임 등의 폭력적인 장면을 접하면서 분노 폭발을 학습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김병수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분노도 중독이 된다. 화를 내서 해결되는 경험을 맛보면 분노로 뭐든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 화를 내면 나쁜 사람이란 인식 강해
속이 부글부글 끓어도 참는 게 문제


분노조절장애를 일으키는 요인은 생물학적, 사회·경제적, 문화·환경적 측면 등 다양하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특히 분노 조절에 취약한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자극에 예민하면서 조급하고 ▶화를 무조건 참고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자주 화를 내는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 등이다.

공진수 동행심리치료센터장은 “분노는 억압이 아닌 조절의 대상이기 때문에 누르면 누를수록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며 “한국인은 화를 내면 나쁜 사람이란 인식이 강해 속이 부글부글 끓어도 잘 표현하지 않고 참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분노조절장애가 개인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안용민 교수는 “자신도 주체하지 못하는 분노 폭발은 폭행부터 살인까지 심각한 사회 범죄로 이어져 타인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보복운전, 데이트폭력, 아동학대 등 그 유형도 다양하다.

| 갈등 상황 벗어나는 ‘타임아웃’ 훈련
어린시절부터 감정 조절 교육해야


스스로 판단하기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정도로 분노 조절에 문제가 있다면 전문가를 찾아 상담과 치료를 받는 게 좋다. 안용민 교수는 “상담이나 적절한 약물 치료를 통해 환자가 분노를 행동으로 표현하기 전에 감정이나 생각을 스스로 인식하고 말로 표현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고 말했다.

분노 조절이 쉽지는 않지만 아직 초기 증상이라면 훈련을 통해 조절 습관을 들일 필요가 있다. 김병수 교수는 “자기 감정의 사인을 잘 확인하라”고 조언한다. 얼굴이 붉어지거나, 목소리가 떨리는 등 자신만의 ‘분노 사인’을 파악해 대처 방법을 미리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분노를 야기하는 상황을 잠시 벗어나는 ‘타임아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공진수 센터장은 “갈등 상황이라면 일단 그 상황을 잠시 벗어나 냉각기를 가진 뒤 시간을 정해 놓고 다시 이야기하라. 그러면 차분하게 문제의 본질에 대해 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 좁은 공간보다는 시야가 트이는 넓은 공간으로 나가 생각을 비우는 게 좋다.

평소 운동과 같은 취미 활동을 통해 쌓여 있는 화를 다른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방법도 있다. 김병수 교수는 “숙면을 하고 술이나 커피 등 불필요한 자극을 줄이는 등 환경을 바꿔보라”고 조언했다.

감정 조절 훈련은 어린 시절부터 이뤄지면 더 효과적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 때문에 가정이나 학교에서 실시하는 감정 조절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대구시교육청은 이달 말부터 관련 전문가들이 개발한 교재를 활용해 일부 초등생을 대상으로 감정 조절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1~2학년은 내 안의 감정을 살펴보는 놀이 활동, 3~4학년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게임, 5~6학년은 소통 능력 기르는 역할극으로 구성된다.
 
영화‘베테랑’의 조태오는 분노조절장애 아닌 사이코패스

영화 ‘베테랑’의 조태오(유아인)는 ‘분노조절장애’일까, ‘사이코패스’일까. 그는 잔인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한다. 임금 체불에 항의하는 노동자를 어린 아들이 보는 앞에서 폭행하도록 지시하고, 경호원과 이종격투기를 하며 반칙으로 발목을 부러뜨린다. 일이 잘 안 풀리자 키우던 개를 골프채로 내리쳐 죽이기도 한다. 분노를 자주, 과도하게 폭발시킨다는 점에서 얼핏 ‘분노조절장애’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사이코패스’에 가깝다. 자신이 하는 행동에 대해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분노조절장애’와 ‘사이코패스’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죄책감이라고 설명한다.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일종인 ‘사이코패스’는 공감능력 결핍, 죄책감 결여, 계획적인 범행이란 특징이 있다. 살인 자체를 즐기는 연쇄 살인범들에게서 발견된다. 반면 분노조절장애는 ‘후회’를 동반한다. 안용민 서울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분노 폭발과 후회를 반복하는 게 분노조절장애”라고 설명했다. 초등생 아들을 숨지게 하고 시신을 훼손해 냉동고에 보관한 친부를 놓고도 논란이 있었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시체 훼손이 증거 인멸을 위한 것이고 그가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사이코패스’보다는 ‘분노조절장애’에 가깝다고 분석한다.

글=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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