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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으로] 토착품종 300종, 요즘도 신품종 나오는 ‘포도의 쥐라기공원’

중앙일보 2016.04.16 00:36 종합 14면 지면보기
| 고유품종 50개가 전체 생산량의 90%
세계서 일반화된 품종 아닌 게 매력

'신화'로 와인 빚는 그리스

미네랄 성분 많아 시릴 정도로 상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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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한 와이너리에서 산비탈을 따라 펼쳐진 포도밭을 배경으로 이 지역 와인생산업자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와인을 들어 보이고 있다. 2009년 이래 계속되는 경제위기 속에서 그리스 와인은 고품질화·수출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사진 강혜란 기자]


그리스 수도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115㎞ 남짓 떨어진 네메아강 상류 계곡의 ‘세멜리 와이너리’.

지난달 28일 이곳을 찾았을 땐 봄 햇살에 앞서 거센 바닷바람이 볼을 스쳤다. 네메아가 속한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그리스 본토와 코린토스 해협으로 연결돼 있다. 거센 해풍은 뜨거운 지중해 햇살 아래 포도밭에 습하고 서늘한 환경을 마련해준다.

이곳의 주력 품종은 아기오르티코다. 그리스 토착 적포도 품종으로 별명이 ‘헤라클레스의 피’다.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의 아들로 지상에서 가장 힘센 영웅이다. 그가 신탁을 받아 행한 열두 과업 중 첫 번째가 네메아의 사자를 퇴치하는 일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헤라클레스가 사자를 때려눕힐 때 흘린 피에서 자란 포도가 아기요르티코라고 한다.

| 와인 생산량 세계 17위, 3%만 수출
와이너리 2008년 400개 → 작년말 718개
“그리스 와인 르네상스 시작됐다” 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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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와인은 고대 신화와 역사를 자양분 삼아 새로이 도약하고 있다. 위로부터 와인잔에 비친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이렇듯 그리스 와인은 올림포스 신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5000년 역사를 자랑하지만 근대 이후엔 세계인의 관심 밖에 머물렀다. 대부분 와이너리가 가내영세업 수준으로 전체 생산량이 270만 헥토리터(2015년 기준, 1헥토리터=100L)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생산량 기준 세계 17위다. 이 중 97%가 국내에서 소비되고 3%만 수출된다. 당연히 세계 시장에서 인지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최근 들어 판도가 달라지고 있다. 2008년 400여 개였던 와이너리는 지난해 말 718개로 배 가까이 증가했다. 점진적으로 해외 수출도 늘고 있다. 주력인 화이트 품종 사바티아노·로디티스뿐 아니라 북부 그리스의 대표적인 레드 품종 시노마브로 는 이탈리아에서 ‘왕들의 와인’으로 불리는 바롤로에 견주어도 손색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스 와인이 르네상스를 맞았다”는 평가는 어디까지 사실일까. 그리스의 KOTRA라 할 ‘엔터프라이즈 그리스’의 초청을 받아 지난달 말 산토리니 섬, 펠로폰네소스 반도, 아테네 등지의 와이너리를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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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리니 섬에서 고유의 ‘쿨루라’ 재배법으로 동그랗게 말아 키우는 포도나무.


쪽빛 하늘 아래 하얗게 회칠한 전통 가옥들이 그림엽서처럼 펼쳐져 있는 섬 산토리니. 언덕배기 이아 마을에 자리 잡은 ‘도메인 시갈라스’의 포도밭을 찾았다. 특이하게도 포도나무가 모두 발치에서 동글동글하게 자라고 있었다. ‘쿨루라(kouloura)’라고 불리는 산토리니 고유의 재배 방식이다. 어린 나무의 줄기를 동그랗게 구부려줘 포도 덩굴이 똬리를 틀며 자라게 한다. 지중해의 뜨거운 햇살과 거센 해풍으로부터 포도송이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다. 대신 “일일이 사람 손으로 따야 하기 때문에 생산량이 적을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었다.

기원전 1600년께 화산 폭발이 있었던 산토리니에선 토착 품종에 이 화산토양의 ‘테루아르(Terroir·자연 환경 또는 자연 환경으로 인한 포도주의 독특한 향미)’가 온전히 표현된다. 특히 대표 품종인 아시르티코(Assyrtiko)는 미네랄 성분이 아주 높아 이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을 입에 대면 시리다 싶을 정도로 ‘쨍한’ 상쾌함을 느낀다.

샤르도네나 소비뇽 블랑 등 전 세계적으로 일반화된 품종이 아니라 그리스 고유 품종으로 만든 ‘신상’ 화이트 와인을 만난다는 것이 그리스 와인의 첫 번째 매력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토착 품종만 300여 종인데, 요즘도 수백 년 된 개인 포도밭 어딘가에서 새로운 품종이 발견된다고 한다. “그리스가 포도 품종의 ‘쥐라기 공원’ 같은 곳”이란 전문가의 말이 과장이 아니다. 프랑스·이탈리아 등 와인 강국이 앞서갈 동안 ‘게토(강제 격리 거주구역)’화되다시피 뒤처져 있었던 게 오히려 득이 된 셈이다.

산토리니에서 5대째 와인을 생산 중인 ‘가발라스 와이너리’의 에반겔로스는 아테네에 있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 취직을 준비하던 2009년 금융위기가 그리스를 덮쳤다. 도시에선 일자리를 찾기가 어려워 산토리니로 돌아왔다. 다행히 그가 대학에서 배우고 엿본 경영전략과 와인재배 신기술이 아버지의 가업을 잇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할아버지 때만 해도 포도를 밟아 으깨 압착했어요. 이 과정을 현대 장비들로 바꾼 게 얼마 안 돼요. 프랑스·독일 등에서 공부하고 온 유학파 동료들도 많아요. 다들 그리스 와인이 더 이상 저렴한 구식으로 여겨지지 않게 현대화·고품질화에 승부를 걸고 있죠.”

| 연간 4만병 넘지 않게 소량 생산
“와이너리 영세하지만 희소성 강점가격은 싼데 품질 좋아 인기 끌어”

조지 스쿠라스 그리스와인연합(GWF) 회장에 따르면 신종 재배기법의 보편화, 양조 기술의 현대화 등으로 인해 세계 각국의 생산 환경은 비슷해졌다. 이제 남은 건 와인의 차별화된 정체성과 ‘스토리텔링’이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 와인은 경쟁력이 있다. 300종 남짓한 토착 품종 가운데 50개가 전체 그리스 와인 생산량의 90%를 차지한다. 카베르네 소비뇽, 시라 같은 세계 와인생산업계의 인기 품종이 그리스에선 ‘블렌딩할 때 쓰는 보조 품종’일 정도다.

게다가 그리스에선 웬만큼 잘나가는 와인도 연 4만 병 이상 생산되는 게 없다. 1만 병이면 꽤 많이 하는 편이다. 개별 와이너리가 지극히 영세한 탓이지만 이런 희소성이 오히려 강점이 되고 있다. 세계적인 와인전문자격증 ‘마스터 오브 와인’을 그리스 출신으로선 처음 취득한 콘스탄티노스 라자라키스는 “프랑스산에 비해 가격은 훨씬 싼데 품질은 좋고 구하기도 쉽지 않아 그리스 와인의 인기가 계속 올라가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그리스 와인업계가 활발히 움직이는 건 자생적인 발전 요인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세금 문제가 있다. 그리스 정부는 경제위기 이후 부족해진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주세를 확 높였다. 가격 기준 부가가치세는 8년 전 8%에서 현재 23%나 된다. 올해 들어 L당 20센트가 추가되기까지 했다. 와이너리들이 큰 타격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갑이 가벼워진 소비자들은 병으로 파는 와인 대신 벌크(bulk) 와인에 몰리고 있다. 식당에서 통으로 들여와 주전자에 담아 파는 벌크 와인은 0.5L에 4유로 정도로 싸다. 대신 일반 와인에 비해 묽고 맛도 ‘맹탕’에 가깝다.

| 30~40대 와이너리 창업자들 많아
프랑스·독일서 신기술 배워 현대화
고품질 와인으로 해외시장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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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 된 암포라로 레치나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의 제조업자.


고품질 포도를 벌크와인 제조용으로 넘겨야 할 처지가 되자 생산업자들은 직접 와인 브랜드를 설립하고자 나섰다. 경제위기 이후 그리스 와이너리 숫자가 급증한 이유다. 이들 신생 창업자들은 토착 품종으로 고품질 와인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내수 시장에 매달리기보다 해외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리스 와인연합은 2008년부터 5년 단위 해외 홍보 및 마케팅 전략을 마련, 생산자들의 해외 시장 개척을 돕는 교육·홍보·시음·와인투어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리스 와인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단계”라고 엔터프라이즈 그리스의 와인무역파트 담당 요르고스 파파파나요토는 말했다. 비록 당장 ‘명품 와인’ 반열에 오르지 못해도 주류 와인에 질린 이들에게 흥미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단 얘기다. 무엇보다 그리스 와인을 마시는 건 포도 품종부터 병 외관을 장식하는 레이블 디자인, 브랜드 이름에서 수천 년 올림포스 신화를 경험하는 일이다. 이를테면 세멜리 와인의 아기오르티코를 마시는 일은 ‘헤라클레스의 피’를 음미하는 것뿐 아니라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탄생에 경배하는 일이다. 세멜리는 신화 속 디오니소스의 어머니다. 익숙한 듯해도 실은 알려진 게 없어 신비로운 그리스 와인. ‘디오니소스의 후예’가 깨어나고 있다.
 
800년 된 흙항아리 ‘암포라’서 숙성시킨 전통 와인도

고대 그리스에선 와인을 만들 때 ‘암포라(amphora)’라고 하는 흙항아리에 담아 숙성시켰다. 암포라는 목이 길고 몸통이 불룩한 형태로 목 부분에 세로 손잡이가 두 개 달려 있다. 와인뿐 아니라 물, 기름, 각종 곡식류를 저장해 두는 용기로 쓰였다.

암포라로 와인을 만들던 당시 그리스인들은 공기가 드나드는 것을 막기 위해 암포라 뚜껑과 안쪽에 송진을 발랐다. 완성된 와인에선 특유의 소나무 향이 짙게 배어났다. 이것이 레치나(retsina) 와인이다. 레치나는 그리스어로 ‘송진(松津·소나무 진액)’이라는 뜻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솔향 와인을 즐겼고 후대에 와인 제조기법이 발달한 뒤에도 전통 와인으로서 명맥을 유지했다.

근대 그리스 와인이 침체기에 빠져 있을 동안 해외로 주로 팔려간 건 이들이었다. 레치나의 인기는 대신 ‘그리스 와인=싸구려’라는 편견을 낳았다. 좋지 않은 품질의 와인을 솔향으로 감추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반면 레치나 와인의 전통을 되살리되 ‘프리미엄 품질’로 승부하는 곳들도 있다. 코린토스 인근의 ‘테트라미토스 와이너리’는 옛날식 암포라로 레치나 와인을 생산 중이다. 지하층에 도열한 암포라 중엔 무려 800년 된 것도 있다. 엄선된 포도만을 골라 제조하면서 “선조들이 만들던 방식대로 와인 맛을 즐긴다”가 포인트다. 요즘은 암포라에 송진을 직접 바르지 않고 천연 송진가루를 티백처럼 만들어 와인 숙성기에 첨가한다고 한다.

그리스=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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