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폭로 타깃은 글로벌 기업”… 조세피난처와 전쟁 시즌2

중앙일보 2016.04.15 01:29 종합 19면 지면보기
기사 이미지

| 탐사언론, 파나마 페이퍼스 폭로

[똑똑한 금요일] 공격받는 '탈세의 파라다이스'

“미 기업의 숨겨진 돈 1616조원”

 
기사 이미지

“폭로는 분노를 낳고 분노는 변화로 이어진다.” ‘탐사보도의 어머니’인 아이더 타벨(1857~1944)의 말이다. 그는 ‘석유왕’ 존 D 록펠러의 불법과 탈법을 1902년 폭로했다. 그의 폭로는 미국 경제사에서 의미 있는 분수령이 됐다. 거대 기업의 불공정 거래에 대한 견제가 시작돼서다.

타벨의 폭로 이후 114년이 흘렀다. 요즘 그의 후예들이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다. 이들이 최근 파나마 페이퍼스(Panama Papers)’를 폭로했다. 페이퍼스는 조세피난처(tax haven)인 파나마에 세운 페이퍼 컴퍼니(Paper Company·유령 법인)의 약칭이다. 조세피난처란 법인의 실제 소득 전부 또는 일부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지 않거나 낮은 세율을 적용하는 국가나 지역을 말한다. 기업이나 개인이 조세피난처에 유령법인 등을 세우는 이유는 세금을 덜 내기 위해서다.

| 시진핑·캐머런·푸틴 연루 됐지만
핵심 고객은 애플·GE 등 거대 기업

 
기사 이미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부터) 등이 파나마 페이퍼스 스캔들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돼 비판을 받고 있다. [중앙포토]


타벨의 후예들이 공개한 리스트엔 조세피난처에 법인을 세워 돈을 굴린 유명 인사 이름이 무더기로 올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등이 직간접적으로 조세피난처와 거래를 벌인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이 직접 거래를 했거나, 아버지 등 친인척이 거래를 한 정황이 드러났다.

톰슨로이터는 정치 평론가의 말을 빌려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정치 리더들은 평소 ‘정의, 반부패, 애국’ 등을 정치적 자산으로 내세웠다. 이들이 천문학적인 자금을 빼돌렸다는 의혹에 대중이 분노하고 있다”고 전했다.

타벨의 말처럼 분노가 변화로 이어질지 관심이다. 사실 주요 국가는 2000년 이후 조세피난처와 전쟁 중이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선봉에 섰다. 그해 OECD가 처음으로 조세피난처 리스트를 공개했다. 동시에 스위스 등 리스트에 오른 나라들을 압박했다. 돈 주인을 공개하라는 압력이었다.

OECD가 리스트를 공개한 계기는 주요국 재정난이었다. 미국 등이 각종 감세 정책 때문에 세수가 줄자 조세피난처의 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돈을 포착해 세금을 물리면 세수를 늘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당시 블룸버그통신은 “OECD의 리스트 공개가 조세피난처에 대한 첫 체계적·국제적 대응이었다”고 전했다.

조세피난처는 오랜 세월 성역이나 다름없었다. 전문가들이 꼽은 최초의 조세피난처는 현재 그리스와 이스라엘 사이 지중해에 자리 잡은 섬 델로스다. 기원전 166년 델로스는 중개무역을 장려하기 위해 비과세 정책을 채택했다.

조세피난처는 이후 2000여 년 동안 다양한 곳에 존재했다.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 때 왕족과 귀족의 자금이 피난했던 스위스와 벨기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엔 나치 잔당이나 다국적기업이 자금 추적을 피해 즐겨 찾은 버뮤다와 파나마 등이 대표적이다.

OECD는 해마다 조세피난처 리스트를 수정해 공개했다. 금융정보를 착실히 제공하기로 약속한 지역이나 나라는 리스트에서 빼줬다.

OECD의 조세피난처 리스트 공개는 2001년 9·11테러를 계기로 활발해졌다. 각국의 금융감독기관과 정보기관까지 가세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스위스·리히텐슈타인 등의 금융회사 임직원을 압박하거나 회유했다. 테러와 마약조직뿐 아니라 탈세자의 금융정보를 빼내기 위해서였다. 톰슨로이터는 “2003년 스위스 금융그룹 UBS 직원이 비밀금고 리스트가 담긴 CD를 독일 정보기관에 넘겨주었다”며 “그 바람에 독일뿐 아니라 미국 등 주요국 출신 예금자 정보가 고스란히 해당 국가에 흘러들어갔다”고 전했다. 이후 스위스가 비밀계좌 정보를 공개하기로 했다.
 
기사 이미지

조세피난처 자금은 계속 늘어났다. 2000년 국제통화기금(IMF)이 금융데이터를 바탕으로 추정한 조세피난처 금융자산은 4조6000억 달러(약 5300조원)였다. 하지만 미국 UC버클리대 게이브리얼 저크먼 교수가 지난해 공개한 조세피난처 금융자산은 7조6000억 달러 정도다. 10여 년 새 65% 넘게 늘었다.

OECD 압박 등은 일부 효과가 있었다. 조세피난처 80여 곳 중 60곳 이상이 금융정보를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정보공개가 됐으니 다음 과제는 돈 흐름 차단이다. 저크먼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국경을 넘나드는 자금 중 일부가 금융감독당국의 추적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저크먼 교수는 그 돈을 ‘숨겨진 자산(hidden wealth)’이라고 불렀다.
 
기사 이미지

그의 자료에 따르면 2013년엔 6조1850억 달러나 감독당국에 포착되지 않았다. 일본의 2014년 국내총생산(GDP)보다 1조5000억 달러 정도 많다. 물론 이 돈이 모두 조세피난처로 흘러들진 않는다. 일부만이 조세피난처에 저장된다. 이렇게 조성된 조세피난처 금융자산이 총 7조6000억 달러란 얘기다.

금융 전문매체인 글로벌파이낸스는 “조세피난처에 저장된 자금이 세계 금융자산의 6% 정도라는 게 일반적 추정”이라며 “한 해 탈루되는 세금만도 1900억 달러(약 220조원)”라고 최근 보도했다. 한국 올해 예산의 57%쯤 되는 세금이 탈루되는 셈이다.
 
기사 이미지

조세피난처 핵심 고객은 누구일까. 영국 자선단체인 옥스팜은 “제3세계 독재자나 마약왕이 조세피난처에 숨겨 놓은 자금은 많지 않다”고 전했다. 대신 “애플·월마트·GE 등 거대 글로벌 기업이 조세피난처의 주 고객”이라고 지적했다.

옥스팜이 14일(한국시간) 파나마 페이퍼스를 분석한 결과 미국 거대 기업이 조세피난처에 세운 페이퍼컴퍼니는 1600곳이 넘었다. 이들이 보유한 자산만도 1조4000억 달러에 달했다. 법인세율이 높은 영국 등에서 번 돈을 다양한 방법으로 조세피난처 유령 법인으로 이전시켜 놓은 것이다.

미국 기업이 빼돌린 자금만도 전체 조세피난처 금융자산의 18%에 이른다. 영국이나 독일·일본 기업이 숨긴 자금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옥스팜은 “기업은 조세피난을 ‘통상적인 경영활동’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같은 행위가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요인”이라고 비판했다.

| 정치리더들 기업감시 강화 움직임
록펠러 폭로 100년 만에‘전쟁’재연


불똥이 조세피난 기업으로 번지는 조짐이다. 지금까지는 캐머런·푸틴 같은 정치 리더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집중됐다. 특히 미국 대선 선두주자인 힐러리 클린턴이 미국의 조세피난처인 델라웨어주에 돈을 비축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공개됐다. 화들짝 놀란 힐러리 진영은 서둘러 계좌 폐쇄를 약속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델라웨어주 등 미국 내 조세피난처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동시에 힐러리는 글로벌 기업의 해외 현금자산 도피에 대해서도 제재할 움직임이다. 자신의 추문을 감추기 위해 더욱 공세적으로 나서는 셈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정치 리더들의 연루사실이 폭로되는 바람에 글로벌 기업에 대한 감시가 강화될 움직임”이라고 했다.

100여 년 전 탐사보도 어머니인 타벨이 록펠러의 뇌물 비리 등을 폭로한 직후 당시 정치 리더들이 자신의 추문을 물타기하기 위해 대기업에 대한 비판을 더욱 강화했다. 그 결과 록펠러의 석유 왕국인 스탠더드오일은 법정에서 독점기업으로 지정돼 끝내 분할됐다.
 
▶관련 기사
① 북한도 파나마 통해 유령회사 설립, 핵 개발 자금 조달
② 시진핑 매형, 푸틴 측근도 유령회사 세워 재산 은닉 의혹

한 세기 정도 시간차를 두고 탐사보도의 파장이 재연될 조짐이다. 이번 파나마 페이퍼스 폭로는 글로벌 기업의 조세피난에 대한 규제강화로 이어질 전망이다. 이미 글로벌 기업의 조세피난을 감시할 국제적 틀을 마련했다.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주요 20개국(G20)이 기업의 조세피난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 글로벌 기업이 한 나라에서 얻은 이익을 다른 나라로 이전할 때 세금을 물리는 방안(구글세) 등이 제시됐다. 하지만 이런 제도가 확실히 정착되지 않았다.

OECD가 2000년 시작한 조세피난처와의 전쟁은 이제 시즌 2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다. 세(稅)테크로 세금을 줄이려는 글로벌 기업과 자금흐름을 밝혀내 세금을 물리려는 ‘OECD+ 각국 정부’ 연합군 간의 한판 승부가 시즌 2에 흥미롭게 전개될 것이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