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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검증 때 돼지 피 뿌릴 일 없겠네

중앙일보 2016.04.13 01:18 종합 10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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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대구경찰청 과학수사실험실에서 수사요원들이 모조 혈액 사용을 시연하고 있다. 모조 혈액을 이용해 피가 튄 방향과 각도를 확인하고 혈흔을 살피며 사건 현장을 재구성하고 있다. [대구=프리랜서 공정식]


경찰이 살인 같은 범죄 현장을 재구성할 때 쓰는 피는 주로 동물 피다. 돼지 피를 많이 쓴다. 정교한 판단이 필요한 범죄 현장에선 100mL에 4만원이 넘는 미국산 모조 혈액을 사용하기도 한다. 최대한 사람 피와 유사한 것을 써야 어떤 각도로 얼마만큼의 피가 튀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경찰관의 혈액을 채취해 쓰기도 한다. 꿀 같은 액체에 붉은색 물감 등을 섞어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대구경찰청서 모조 혈액 개발
사람 피와 90% 유사, 값도 저렴


대구경찰청 과학수사계가 사람 피와 점도·탄성이 90% 이상 유사한 모조 혈액을 개발했다. 2011년 대구한의대 향산업학과와 공동 개발에 착수한 지 5년 만에 낸 성과다. 수사 현장에 사용할 수 있는 모조 혈액을 개발한 것은 국내에서 처음이다.

대구경찰청은 이달 말 특허 출원을 끝낸 뒤 경찰청을 통해 전국 지방경찰청에 모조 혈액을 배포할 예정이라고 12일 밝혔다. 모조 혈액은 끈적이는 성질을 가진 화장품 원료를 이용해 만들었다. 점도나 탄성, 색깔이 진짜 피와 유사하다. 동물 피처럼 역한 냄새가 없다. 미국산 모조 혈액의 5분의 1 가격이면 만들 수 있다.

개발 사연은 2011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구경찰청 과학수사계 김영규(51) 경위는 동물 피를 쓰고 싶지 않았다. 역한 냄새가 나고 위생상 불결해 보였다.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일명 ‘꿀피’를 직접 만들어봤다. 초콜릿·캐러멜·꿀 등 50여 가지 액체에 물감을 섞어서다. 하지만 점도와 탄성이 실제 피와 달라 번번이 실패했다. 사람 피는 둔기나 흉기, 손으로 충격을 가했을 때 피가 튀어 나가는 방향이 일정하다. 튀는 방향과 혈흔만 봐도 어느 방향에서 어느 정도의 힘으로 어떤 도구로 범행이 있었는지 예측 가능하다.

김 경위는 액션 영화를 많이 제작한 장진 감독을 찾아갔다. 특수 촬영에 쓰는 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수사용으론 맞지 않았다. 고민하던 중 대구한의대 향산업학과 박찬익(46) 교수를 알게 됐다. 액체의 점성과 탄성을 연구하고 계산해 화장품을 만드는 전문가였다. 김 경위는 박 교수에게 “모조 혈액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흔쾌히 참여 의사를 밝혔다.

과학수사계 동료의 협조 아래 그는 박 교수와 5년간 30개의 피 샘플을 제작해 테스트했다. 사람 피와 다른 혈흔을 내는 샘플은 내다 버리길 반복했다. 개발에 수년이 걸린 이유다. 모조 혈액은 최근 한국고분자시험연구소의 검증을 통과했다. 사람 피와 유사하다고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대구=김윤호 기자 youkno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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