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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내리고 번진 수묵의 춤 … 87세 노장 ‘일탈의 자유’

중앙일보 2016.04.12 01:50 종합 22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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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부터 개인전을 여는 서세옥 화백은 “내 붓끝이 닿으면 사람들 춤과 노래가 흥겹게 어우러질 것”이라 했다(왼쪽). [사진 정재숙 기자], [사진 갤러리 현대]


호가 산정(山丁)이다. 그가 지키는 산은 실상과 허상이 조화를 이루는 그림 정토(淨土)다. 화가 서세옥(87)은 꿈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70여 년을 버텨왔다. 서양 현대미술이 밀고 들어온 한국 화단에서 꿋꿋하게 수묵화의 힘을 믿고 고군분투해온 그는, 한마디 소감을 청하자 긴 침묵 끝에 “고독했다”고 말했다.

오늘부터 갤러리 현대서 개인전
점과 선으로 인간의 모습 표현
“화가의 일은 용을 잡는 것”
요즘도 화실 들어가 종일 그림


12일 개막하는 개인전을 앞두고 서울 삼청로 갤러리 현대에서 만난 산정은 시종 입을 꾹 다물고 “아시다시피 그림은 문자 밖에 있는 건데 어떻게 얘기를 하겠느냐”며 말을 아꼈다. 2014년 대표작 100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고 난 뒤 시원섭섭한 마음을 담아 펴낸 『산정어록(山丁語錄)』이 그의 과묵을 대신한다. “옛 부터 화가의 일을 도룡(屠龍)이라 한다. 용을 잡는다는 말이다. 용이란 있지도 않는 가상 동물일 뿐인데 그것을 잡는다니 어이없는 말이 아니던가. 그러나 화가의 일은 분명코 용을 잡아야 한다. (…) 그림은 그림자의 줄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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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세옥 작 ‘사람들’ 닥종이에 수묵, 170X130㎝. 2015. [사진 정재숙 기자], [사진 갤러리 현대]

1960년 묵림회(墨林會)를 결성해 동양화의 현대화에 나섰던 그의 꿈은 종이 위에서 저마다 흘러가는 수묵의 춤이었다. 조앤기 미시간대학 미술사학과 교수는 서세옥의 작업에서 되풀이되는 주제를 ‘흘림과 확산’, 즉 “수묵이 종이 위에서 흘러내려 그 가장자리들을 향해 그리고 그 너머로 질주하는 번짐의 감동”이라고 설명한다. 흘림과 확산은 전통 수묵화가 고수해온 규범에서 일탈하는 자유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다.

“화법(畵法)은 흐르는 강물과 같다는 잠언을 항상 되새겨 모자람이 없어야 한다. (…) 예부터 지필(紙筆)의 별칭을 유한(柔翰)이라 한다. 종이와 붓은 부드럽기 때문이다.”

산정의 근작은 ‘사람들’이다. 붓이 춤추며 남긴 점과 선이 저들끼리 어우러져 사방팔방으로 뻗어가니 인간의 희로애락이 여기서 뛰논다. 그물망처럼 손에 손을 잡고, 어깨에 어깨를 맞대고, 서로 기대어 새 관계를 맺어가는 인류의 모습은 한 폭의 추상이자 구상이며 수묵이자 드로잉이다. 잡동사니 색깔 따위는 한 치도 들어설 수가 없는 도저한 흑과 백의 물결 속에서 산정은 하늘과 땅을, 인종과 종교를, 이념과 맹신을 허물어 버린다.

서세옥 선생이 창덕궁 연경당을 본떠 서울 성북동에 지은 한옥 이름은 무송재(撫松齋)다. 중국 진나라 시인 도연명의 시 구절,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면서 맴돈다”에서 따왔다. 소나무를 어루만지는 집에서 산정은 아침밥을 먹고 들어선 화실에서 하루 종일 스스로를 감추고 산다. 화가의 길은 혼자 가고 혼자 오는 길이기 때문이다. 전시는 5월 15일까지. 02-2287-3500. 
 
◆서세옥=1929년 생. 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꽃장수’로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50년 서울대학교 미술부 제1회화과를 졸업하고 55년부터 95년까지 서울대 미대 교수를 지냈다. 국전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및 고문으로 활동했다. 한국 미술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2012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성북구립미술관 명예관장, 서울대 미대 명예교수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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