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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라의 아이슬란드 오디세이] ⑪ 오랜 친구와 함께 걷고 싶은 어촌마을

중앙일보 2016.04.11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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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종종 물을 때가 있다. “아이슬란드에서 본 것 중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아?” 고민스러운 질문이다.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한다. “아이슬란드 북쪽에 있던 마을 풍경이 기억에 남아요.” 사람들의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살짝 엿보인다. 살면서 한번 볼까말까 한 오로라나 영화 속에 나온 광활한 폭포, 불이 끓는 대지와 같은 아이슬란드다운 이야기를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아이슬란드에 대한 내 기억의 대부분 또한 그런 것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물으면 사정은 달라진다. 무엇이 가장 대단했고, 웅장했느냐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누군가에게는 파리의 에펠탑보다 18구의 어느 뒷골목에서 보았던 그래피티가, 어떤 이에게는 로마의 콜로세움보다 뜨거운 태양을 식혀주었던 젤라또 한 스쿱의 맛이 더 인상 깊었을 수 있다. 여행 후 남는 잔상의 농도는 장소의 명성보다는 여행자의 개인적인 추억에 좌우될 때가 많다. 나에게 있어 가장 진하게 남은 아이슬란드의 기억은 빙하도, 화산도 아니었다. 섬 북부에 있는 어느 어촌마을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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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큐레이리(Akureyri)로 가던 날이었다. 특별한 계획이 없던 터라, 트롤라스카기(Trollaskagi) 반도의 해안도로를 타고 여유롭게 드라이브를 하고 있었다. 반도의 꼭짓점을 돌자 시글루피요르뒤르(siglufjörður)라는 작은 어촌 마을이 나왔다. 잠시 쉬어갈 겸 차를 세우고 동네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거리는 한산하다 못해 적막감이 철철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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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뒤쪽으로 가니 산 옆으로 산책로가 나 있었다. 길을 따라 조금 오르자 피오르의 품에 안긴 알록달록한 마을 전경이 한눈에 담겼다. 비가 내린 직후라 공기가 유난히 맑고 깨끗했다. 마을 구석구석이 세세하고 또렷하게 보였다. 이 골목에서는 아주머니가 개와 산책을 하고 있고, 저 골목에서는 할머니가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마을을 천천히 벗어나고 있는 차도 보이고, 파란 모자를 뒤집어쓰고 거리를 뛰어가는 아이의 모습도 보였다. 아래에선 보이지 않던 동네 사람들의 삶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적막감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정겨움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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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끝내고 항구로 내려갔다. 시글루피요르뒤르는 과거 아이슬란드의 최대 청어 생산지로 이름을 날리던 마을이라고 했다. 지금은 더이상 청어가 잡히지 않아 명성은 빛바랬지만, 항구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잔잔한 물결 위로 소박한 항구와 마을의 모습이 반사되었다. 하릴없는 어선들이 미풍에 흔들릴 때마다 물속 풍경도 넘실거렸다.

항구 옆 카페 안에는 친구로 보이는 연세 지긋한 노인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내 오랜 친구가 떠올랐다. 나만큼이나 여행을 좋아했던 친구였다. 그녀가 이곳에 왔더라면 그 누구보다 좋아했을 것 같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친구는 나에게 아이슬란드에 가면 꼭 사진을 보내달라고 부탁했었다. 사진을 보면 자신도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녀를 생각하며 마을 구석구석을 사진으로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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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글루피요르뒤르를 뒤로하고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이웃 마을로 향했다. 올라프스피요르뒤르(ólafsfjörður)라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는 커다란 호수가 있었는데, 민물고기와 바닷물고기가 같이 잡히는 신비로운 곳이라고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호수를 마주하는 순간 나는 ‘신비로운 호수의 비밀’이 다른 곳에 있음을 느꼈다. 호수는 마치 거울과 같았다. 진한 브라우니에 슈가 파우더를 뿌려 놓은 듯한 산과 아기자기한 마을, 그 옆으로 겹겹이 중첩된 산맥, 하늘 속 구름의 흐름까지 호수 안에 빠짐없이 담겨있었다. 무엇이 실체이고 무엇이 반영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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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집어들어 호수 속으로 던졌다. 물보라가 거칠게 일며 반영을 와장창 깨뜨렸다. 그러곤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신비로운 데칼코마니를 또다시 찍어냈다. 나는 결국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지금 보고 있는 이 비현실적인 풍경을 친구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절실해졌기 때문이었다. 호수 사진과 함께 오늘 찍었던 사진 여러 장을 전송했다. 나중에 꼭 함께 오자라는 말도 덧붙였다. 몇 분 뒤 친구에게 답장이 왔다. 고마워. 진짜 좋다. 더 보내줘. 나는 호수 앞에 앉아 해가 저물 때까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고, 우리는 함께 마을의 풍경 속을 거닐었다. 그리고 그날 우리가 함께 봤던 모든 장면은 여행이 끝난 지금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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