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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 중시 기업가정신에 걸림돌, 범위 명확히 해야

중앙선데이 2016.04.03 01:21 473호 10면 지면보기
한글과컴퓨터 김상철 회장이 법정에 서야 했던 이야기다. 2005년 1월 벤처기업 소프트포럼을 운영하던 김 회장은 4개월 뒤 공격적인 인수합병(M&A)을 위해 자본금 5000만원에 M&A 전문회사 SF인베스트먼트(SF)를 만들었다. 주가에 영향을 주는 M&A 과정을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김 회장은 SF를 소프트포럼의 자회사로 편입하고 벤처기업인 다윈텍과 아이티플러스를 인수했다. 2008년엔 자신이 가지고 있던 SF의 주식 1만7500주를 주당 10만5000원으로 평가해 소프트포럼이 인수하도록 했다. 개인이 아닌 회사가 지배하도록 구조를 변경하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6년 뒤인 2014년 검찰이 “SF의 지분 가치가 ‘제로(0)’였다”며 소프트포럼에 18억3750만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로 김 회장을 재판에 넘겼다. 하지만 이듬해 2월 서울중앙지법은 “주식가치가 적정하지 않다고 볼 근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개인적으로 이익을 얻은 것도 없다고 밝혔다. 5개월 뒤 서울고등법원에서도 무죄가 나왔다. 검찰은 상고를 포기했고, 무죄가 확정됐다. 김 회장은 2년여의 지루한 법정 투쟁을 벌인 끝에 ‘배임의 늪’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김 회장에게 적용된 배임죄는 기업의 손해 규모가 5억원 이상일 때 적용되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가법)이다. 유죄 판결을 받았다면 3년 이상의 실형을 살게 되고, 기업인으로 활동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귀에 걸면 귀걸이’ 배임죄

배임죄는 무죄율이 높다. 배임죄가 기업에 폭넓게 적용된 건 1997년 외환위기 사태 이후다. 기업이 망하면 국가 경제가 흔들린다는 사회적 인식이 검찰과 법원에도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실제로 99년 이후 법원 판결 검색 시스템에 등록된 판결문 중 배임이 포함된 사건은 수만 건이다. 이 가운데 ‘배임’과 ‘경영상 판단’으로 검색한 ‘무죄’ 사건만 2000여 건에 달한다.



2011년부터 지난해 6월까지 기소된 배임 사건에서 형법상 배임과 업무상 배임은 7~12%의 무죄율을 기록했다. 전체 형사사건의 무죄율이 연도별로 3~5%대인 점을 감안하면 두 배 이상 높은 수치다. 또 특경가법상 배임 사건의 무죄율은 18~24%로 100건 중 20여 건이 무죄를 받았다.



1일 대검찰청에서 열린 기업비리 커뮤니티에 참석해 이 같은 내용을 발표한 이창온 거창지청장은 “최근 배임 사건들에서 경영판단 때문에 무죄가 선고된 판결은 많지 않았다”면서 “오히려 배임의 고의를 입증하는 어려운 문제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수사를 통해 피의자가 위험이 발생할 것을 알고도 그랬다는 속마음을 입증하기도, 손해가 발생할 수 있었다는 점을 밝혀내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무죄율이 높다는 건 수사가 부실해 증거가 부족했거나, 경영상 판단이었다는 점을 검찰이 확정하는 게 애매하니 일단 법원 가서 판단을 받아보라고 기소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배임죄를 적용한 무분별한 기소는 기업의 경영활동을 위축시키고 투자를 어렵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특경가법상 배임의 무죄 사건 유형 중 24.5%는 제3자 부당지원이다. 이른바 ‘모험투자’다. 모험투자는 수익률은 높지만 회수율이 낮은 위험성 있는 투자를 말한다. 대기업의 계열사 지원부터 M&A 등 각종 투자, 스타트업이나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것도 포함된다. 어려운 계열사를 지원하거나 새로운 도전과 대박을 노린 투자가 결과적으로 실패하면 배임으로 처벌받는 셈이다.



남민우 다산네트웍스 대표는 “기업은 태생적으로 (성공 여부를 떠나) 진행형인데 배임죄는 진행 중일 때보다 실패라는 결과에 무게를 두고 처벌하는 것”이라며 “망하면 인생이 결딴 나는 사회에서 누가 공격적인 투자를 하겠느냐”고 말했다.



이 때문에 앞만 보고 달리기에도 바쁜 기업들이 배임을 피하는 방법에 에너지를 써야 한다. 최근 코스닥 상장사나 벤처기업들은 임원 회의나 이사회에서 투자와 관련된 안건마다 배임 여부를 토론한다고 한다.



준법경영이란 면에선 긍정적 효과지만, 도전과 모험을 바탕으로 한 기업가정신은 후퇴한다는 시각이 많다.



한국상사법학회장을 지낸 최준선 성균관대 로스쿨 교수는 “배임죄부터 고민하는 기업의 모습은 세계 어떤 국가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배임죄가 없어지거나 제한적으로 적용되면 민사소송 외엔 손해 발생에 대한 해결 방법이 없어 더 큰 모럴해저드를 낳을 수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특히 ‘회사가 내 것’이란 생각에서 시작되는 오너 중심의 한국 기업 문화에서 발생하는 폐해를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도 지난해 배임 조항에 대해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그 입법 목적의 정당성이 인정되고, 법원의 판례가 배임조항의 이득액 개념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며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국내 기업들의 배임에 대한 고민은 투자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투자한 회사가 망하면 결과적으로 투자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혐의가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을 개인적으로 빼내 사용해 처벌되는 횡령과 달리 배임은 사업이 망하면 배임 적용 가능성이 높아진다.



서형석 엘케이비앤파트너스 변호사는 “배임죄를 광범위하게 적용하면 투자나 창업이 위축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서 변호사는 “배임은 추상적인 규범이 구체적인 회사 업무를 규제하는 것”이라며 “기업 입장에선 횡령이 되는 요건은 스테인리스로 만든 테두리처럼 명확한 반면 배임은 고무줄처럼 탄력적이라 언제나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심리적 부담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분위기와 함께 최근 자원개발 사건으로 기소된 공기업 사장과 방위사업 비리 연루 의혹을 받고 배임으로 기소됐던 고위 인사가 줄줄이 무죄를 받으며 배임죄를 보다 명확하게 손질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지낸 황정근 변호사는 “배임죄의 구성 요건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며 “판례를 통해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있지만 법률을 정비해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오이석 기자 oh.is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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