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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두슈에 맞선 런비스 “현실 직시하는 게 진리”

중앙선데이 2016.04.03 01:12 473호 28면 지면보기

2 런비스는 그림·피아노·전각·낚시·촬영·서예 등 취미가 다양했다. 베이핑(北平·현 베이징) 입성 후, 교외에 사냥 나온 런비스. [사진 김명호]



런비스(任弼時·임필시)는 눈치나 보는 기회주의, 불리하다 싶으면 둥지를 바꾸는 투항주의, 패거리 짓기 좋아하는 분열주의를 경멸했다. 극좌(極左)는 더 혐오했다. 원인을 간부의 자질과 청년 교육 부재로 돌렸다.


사진과 함께 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72-

“혁명과 전쟁은 난관의 연속이다. 이탈자가 속출하기 마련이다. 불필요한 희생을 피하려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현실을 존중하는 판단과 결정이 따라야 한다. 그러다 보면 단결과 투쟁을 거론할 자격이 저절로 생긴다.”



많은 사람이 비슷한 말을 남겼다. “런비스에겐 묘한 매력이 있었다. 황당한 사람도 그와 마주하면 진실한 사람으로 변했다. 연약한 사람은 강해졌다.”



중공(중국 공산당)은 온갖 사연을 남긴 혁명 정당이었다. 창당 이래 위기에 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정적인 위기도 두 차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런비스는 돋보였다.



사회주의 청년단 총서기 시절, 당 총서기 천두슈(陳獨秀·진독수)는 고집이 세고 친화력이 부족했다. 학자로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었지만, 가장(家長) 기질이 말도 못할 정도였다. 도시 폭동에 버금가는 파업과 시위에만 열중했다. 결국 장제스의 정변을 초래하고, 쓸데없는 희생자만 양산했다. 그래도 당 전체가 천두슈의 명성에 숨을 죽였다. 불평 한마디 못했다.



1927년 6월 중순, 존망의 위기에 처한 중공은 확대회의를 열었다. 새파란 런비스가 발언을 요청했다. 천두슈는 한번 흘겨보더니 같잖다는 표정을 지었다. “발언 요청자가 많다. 기다려라.” 몇 번을 얘기해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런비스는 분노했다. 천두슈의 동의 여부를 무시해 버렸다. 의견서를 꺼내 선포했다. “사회주의 청년단을 대표해 당 중앙에 정치 의견을 보고합니다.” 태도가 정중했다.



천두슈는 의견선지 뭔지 들을수록 화가 났다. 실성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났다. “닥쳐” 소리와 동시에 주먹을 쥐고 튀어나갔다. 런비스의 손에서 의견서를 낚아챘다. 찢어 던지고 발로 짓이겼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삿대질하며 발끈했다. “여기는 당의 회의다. 청년단은 발언 자격이 없다.”

1 신중국 선포 직전 중공 중앙은 런비스에게 휴양을 권했다. 1949년 9월말, 휴양지에서 북한 청년 대표단의 방문을 받은 병중의 런비스(오른쪽에서 세번째).



런비스는 침착했다. “그간 총서기의 의견을 진리라 여겼습니다. 역량을 무조건 신뢰했습니다. 의견서를 찢는 것이 역량의 표현입니까? 선동은 더 이상 쓸모가 없습니다. 저들의 무장에 맞서려면 우리도 무장을 갖춰야 합니다.” 천두슈는 책상을 쳤다. “닥쳐라. 어린 놈이 뭘 안다고.” 런비스는 흥분하지 않았다. 참석자들에게 호소했다. “진리는 별게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최후의 승리자는 진리입니다.”



2개월 후, 천두슈는 당에서 축출 당했다. 당의 책임자로 부상한 취추바이(瞿秋白·구추백)는 런비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천두슈를 비난하며 청년단의 각오와 담력을 치하했다. 런비스는 취추바이에게도 실망했다. “과장이 심하다. 천두슈는 나의 정치적 성장에 스승과 같은 분이다. 존경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스승을 사랑한다. 애석하게도, 진리를 더 사랑할 뿐이다.”



장정 도중, 중공은 둘로 분열될 뻔한 적이 있었다. 최대의 위기였다. 분열 저지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도 런비스였다. 이 부분은 훗날 따로 설명키로 한다.



런비스는 30대에 50대 후반처럼 늙어 보였다. 두 번의 체포가 이유였다. 온갖 악형에도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고 동지들을 팔지 않았다. 전기고문으로 주먹만한 흉터 두 개가 죽는 날까지 등에 남아있었다. 런비스는 시종일관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을 지지했다. 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에 이르기까지 “마오쩌둥의 노선이 중국 현실에 가장 부합되고 정확하다”는 주장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38년 모스크바에 갔을 때도 코민테른 측에 강조했다. “마오쩌둥이야말로 중공의 영수다. 사사로운 정 때문이 아니다.” 중공은 코민테른의 지부(支部)였다. 코민테른은 런비스를 신뢰했다.



40년대 초, 중공의 항일 근거지 옌안(延安)에서 대규모 정풍(整風)운동이 벌어졌다. 마오쩌둥이 직접 주임을 맡았다. 부주임 캉성(康生·강생)은 극좌의 표본이었다. 밀고를 조장하고 닥치는 대로 잡아갔다. 많은 간부들이 반도(叛徒)로 전락했다.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많았다. 런비스는 “당을 구하기 위해 시작한 운동이 불량한 쪽으로 변질됐다”며 우려했다. 마오쩌둥에게 간했다. “반혁명 세력이 우리의 혁명대오를 추월했다니, 믿을 수 없다. 엄밀한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 실사구시(實事求是)를 견지하자. 우리는 외부에 강한 적이 있다. 내부에도 매사에 소극적인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좌를 기준으로 정리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돕고 끌어안아야 할 동지들이다. 병을 치료하고, 사람을 구하는 자세를 취함이 마땅하다.” 마오쩌둥은 런비스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캉성을 산둥(山東)으로 보냈다.



캉성은 평소 런비스를 무서워했다.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상하이대학 시절 스승이었다”고 둘러댔지만 말뿐이었다. 런비스 앞에만 가면 주눅이 들고, 감히 덤빌 엄두를 내지 못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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