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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인생은 쇼쇼쇼, 비극도 죽음도 쇼쇼쇼

중앙선데이 2016.04.03 00:24 473호 30면 지면보기
황량한 벌판 위에 아름다운 여인이 홀로 서 있다. 사수들이 일제히 그녀를 조준하는 찰나, 갑자기 화려한 의상을 입은 해설자와 무희들이 튀어나와 캉캉춤을 춘다. 자, 이제 쇼가 시작된다.



창작뮤지컬 ‘마타하리’ 세계 초연의 막이 올랐다. 그간 ‘엘리자벳’‘모차르트’ 등 유럽 뮤지컬을 우리 관객 입맛에 맞게 재창작해 선보여온 EMK뮤지컬컴퍼니가 처음으로 시도한 창작뮤지컬이다. 250억원 규모로 세계시장을 겨냥해 출발한 글로벌 프로젝트인 만큼 기획 단계부터 화제가 됐고, 개막일인 지난달 29일 이미 객석에는 해외 바이어들이 몰려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창작뮤지컬 ‘마타하리’, 3월 29일~6월 12일 블루스퀘어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을 비롯해 연출가 제프 칼훈, 극작가 아이반 멘첼, 작사가 잭 머피 등 주요 창작진을 모두 브로드웨이에서 초청해 드림팀을 꾸렸다. ‘마타하리’라는 소재부터 국경초월적 캐릭터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프랑스의 이중 스파이 혐의로 처형된, 네덜란드 출신으로 자바왕족 행세를 하며 인도춤을 추던 무희 아니던가.



공연 후 창작진과 함께 무대에 오른 엄홍현 프로듀서는 “여기 올라온 분들이 다 외국인이라 창작뮤지컬이 아니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분들 빼고는 다 한국인”이라고 새삼 강조했다. 하지만 내셔널 아이덴티티를 내세운 작업도 아니고, 애초에 세계시장에 유통될 만한 콘텐트를 제작해 돈을 벌겠다는 기획인 만큼 국적 논란은 부질없다. 얼마나 완성도 높은 무대로 뽑아냈느냐가 문제고, ‘마타하리’는 후한 점수를 매길 만하다.



비극적 드라마를 한바탕 쇼로 풀어낸 연출부터 돋보였다. 마타하리가 누군가. 물랭루즈에서 사교계의 꽃으로 군림하며 숱한 남자들과 염문을 뿌린 ‘만인의 연인’이다. 스타성은 사후에도 여전해 지난 100년간 ‘미녀 스파이’의 원조로 끊임없이 재생산돼 왔지만, 1999년 비밀해제된 관련문서에서 그녀의 혐의가 증거 없음이 드러났다. 진실은 덮어둔 채 그녀의 삶 자체를 쇼처럼 소비해 온 대중의 관음증을 패러디한 흥미로운 연출이 아닐 수 없다.



‘에비타’‘엘리자벳’ 등 극을 넘나드는 해설자가 서사극처럼 풀어가는 무대는 더러 있다. 하지만 극과 쇼를 교차시키며 극적 갈등의 절정을 곧바로 쇼로 전환시키는 전개 스타일이 신선했다. 마타하리가 프랑스와 독일에서 각각 스파이 제의를 받는 순간 네 명의 남자 무용수들이 함께 엮이며 탱고를 추고,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는 순간 재판관들이 법복을 벗어던지고 캉캉을 추는 식이다.



이런 설정에 딱 맞게 무대 전체는 물랭루즈 극장으로 꾸며졌다. 글로벌 오디션을 거쳐 발탁된 오필영 무대디자이너는 영상에 의존하거나 상징적 디자인으로 규모를 줄이는 트렌드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압도적 물량의 세트를 동원했다. 회전무대는 기본, 10개의 타워가 전후좌우상하로 이동하며 대극장부터 밤거리, 비행기 격납고와 병원 등 다양한 공간을 순식간에 만들어냈다. 공중에서 회전과 조명을 이용해 독일과 프랑스 국기가 교차되며 베를린과 파리를 오가는 마법 같은 장면전환은 예술적이었고, 수직상승하는 전투기와 실물크기 기차 칸도 공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프랭크 와일드혼의 음악은 욕심이 좀 과해 보였다. 옥주현·류정한 등 최고 가창력의 배우들도 버거워 보일 만큼 고음 폭발이 두드러졌지만 울림을 전한 건 특유의 서정적 멜로디였다. 화려한 쇼 뒤에 그녀가 감추고 있던 비밀은 스파이 행적이 아니라 애틋한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마타하리의 솔로 ‘예전의 그 소녀’와 아르망과의 듀엣 ‘언젠가’, 작품의 모티브인 ‘노래는 기억해’ 등은 ‘팜므파탈’이란 가면 뒤에 가려진 진실한 내면을 호소하는 듯 했다.



사실 ‘팜므파탈’도 남성을 위한 존재고, 마타하리의 비극도 남자들의 전쟁과 정치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비극을 스스로 뒤집게 한 것이 이 무대의 미덕이다. 사랑에 속고 배신에 울었어도 쇼가 남았다. 란제리 차림으로 무대를 활보하며 남성들 시선에 소비되는 그녀가 보기 불편하지 않은 건 스스로에게 당당한 캐릭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 몸을 팔던 과거가 ‘자랑스럽지도 부끄럽지도 않다’고 말하는 당돌한 그녀이기에 쟁쟁한 남자배우들을 주변인물로 밀어내고 원톱으로 극을 이끄는 지위를 부여받은 것 아닐까.



하여 그녀의 드라마는 비극이 아니다. “관객은 많아?” “기자들은?” 첫 등장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수차례 반복되는 두 마디가 암시하듯 그녀는 쇼로 인해 살았고, 죽어서도 여전히 쇼 안에 머물고 있으니 말이다. “좋아, 난 이제 사람들 가슴속 영원히 남을 황홀한 무대를 선사할 거야.” 형장에 선 그녀는 총성과 함께 손키스를 날린다. 쇼는 그렇게 계속될 거라는 듯이.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사진 EMK뮤지컬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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