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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 브라와 줄무늬 만난 한복 고티에식 ‘짓궂은 아름다움’

중앙선데이 2016.04.03 00:09 473호 8면 지면보기

이번 전시를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은 장 폴 고티에. 45벌의 오트 쿠튀르 의상을 선보이며 본인도 직접 런웨이에 올랐다.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ㆍ64)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건 매우 어렵다. 예순이 넘은 나이가 무색하게 ‘패션계의 악동’이라는 별명이 잘 어울리고, 여전히 한 발 앞서가는 전위적인 컬렉션을 선보이는 영감 충만한 현역 디자이너이기 때문이다.


서울서 피날레 전시회 연 ‘악동’ 장 폴 고티에

그는 1970년 피에르 가르댕의 어시스턴트로 패션계에 입문해 76년부터는 자신의 이름으로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유쾌한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여왔다. 그의 행보는 늘 예측불가능했다. 90년 마돈나의 월드투어 콘서트 때는 ‘콘 브라(원뿔형 브라)’를 통해 강인한 섹시함을 각인시켰고, 2003년부터 7년간은 명품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세간의 인식을 깨고 에르메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서울디자인재단과 현대카드가 공동주최로 서울 DDP 배움터 디자인전시관에서 개최하는 ‘장 폴 고티에’ 전(3월 26일~6월 30일)에 만전을 기하기 위함이다. 이번 전시는 2011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시작해 뉴욕ㆍ런던ㆍ파리 등을 거쳐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서울이 12번째이자 피날레를 장식하게 됐다. 벌써 세계 각국에서 200만명이 관람한 이 메가톤급 전시의 매력은 뭘까. 지난달 25일 낮과 밤을 고티에스러운 아름다움으로 수놓은 개막 현장을 둘러봤다.

고티에 식으로 재해석한 한복을 입고 개막 기념 패션쇼의 피날레를 장식한 모델 이성경.



 

살아있는 듯한 마네킹이 이번 전시의 가장 큰 특징이다. 실제 사람들의 표정과 목소리를 입힌 마네킹들은 말을 하거나 런웨이를 따라 움직인다. 공간 역시 관람객이 진짜 쇼를 보고 있는 것처럼 배치했다.

스트라이프 패턴과 만난 한복. 치마 끝단은 비대칭적으로 자르고 기다란 족두리를 쓴 것처럼 연출했다.





족두리에서 영감 받은 듯한 머리장식 눈길 장 폴 고티에는 본인의 트레이드 마크인 브레통 피셔맨 스웨터를 입고 등장했다. 검은색 가죽 재킷과 바지로 상하의 컬러를 통일한 그는 “아름다운 도시인 서울에서 피날레를 장식하게 돼 매우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30년 전 일본에 처음 갔을 때 새로운 에너지를 바탕으로 한 ‘발견’이 있었다. 이번에 처음으로 한국에 와 보니 거리에도 정말 우아하고 독특한 의상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더욱 새로운 에너지가 흘러넘치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고티에의 영감은 이날 밤 열린 개막 기념 패션쇼에서 엿볼 수 있었다. 앞선 전시들과 달리 오트 쿠튀르 의상 45벌을 쇼를 통해 함께 선보인 그는 “한국의 전통 의상인 한복의 웨이스트라인(치마말기 부분)을 실험적으로 재해석해봤다”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실제 런웨이에 모델들이 입고 나타난 의상들은 우아하면서도 펑키했다. 앞서 한국을 찾은 칼 라거펠트가 미키 마우스의 머리 모양을 닮은 검은 가체를 선보였다면, 고티에는 족두리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길고 높다란 모자를 주요 모티브로 삼았다. 검은색과 흰색은 기본, 파란색 스트라이프 패턴이 빠지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드레스 역시 고티에식 해석이 한껏 가미됐다. 높게 올라온 웨이스트라인은 콘 브라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고, 얇게 덧댄 시스루 저고리 사이로 레이어드한 스트라이프 패턴이 비쳤다. 앞은 짧고 뒤는 길게 만든 언밸런스한 스커트 사이로는 컬러풀한 스트라이프 스타킹을 볼 수 있었다. 오방색 색동 한복을 보고 대번에 라거펠트를 떠올릴 순 없지만 현란한 줄무늬를 보면 누구라도 고티에를 떠올릴 테니 한층 현명한 선택이랄까.



이날 쇼에 선보였던 피날레 의상은 이번 전시의 첫 번째 섹션인 ‘살롱’에 전시돼 있다. 각종 코르셋과 향수 등이 진열된 은밀한 공간에 우뚝 서 있는 한복이 조금 언밸런스하면서도 묘한 관능미를 자아낸다. 이번 전시를 위한 인트로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1997 FW 프레타포르테 남성복에서 고티에가 선보인 드레스를 모델 타넬 베드로시안이 입고 파리의 생 마르탱 운하에 서 있는 모습.



테디베어부터 깃털·레이스까지 … 영감의 원천 사실 고티에는 줄곧 “회고전은 이미 돌아가신 디자이너를 위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연도별 혹은 순차적으로 진행하기 보다는 본인이 추구하는 테마를 중심으로 전시가 진행되길 바랐다. “전시가 장례식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했어요. 제 옷은 입기 위해 디자인된 것이지 전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니까요.”



처음 몬트리올미술관에서 전시를 기획하고 월드투어를 총괄한 큐레이터 티에리 막심 로리오는 “그동안 고티에가 기존의 규범과 관습을 어떻게 파괴해 왔는지, 또 여러 가지 서로 다른 미를 추구하기 위해 노력해 왔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방식으로 구성했다”고 밝혔다.



동선은 자연스레 그 흐름을 타고 이어진다. ‘살롱’에는 고티에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할머니와 테디베어 나나에 얽힌 이야기가 담겨있다. “미용실을 운영하던 외할머니는 매우 관대하고 개방적인 분이셨어요. 부모님은 남자 아이라고 인형 사주는 걸 꺼려했지만 할머니는 제가 인형을 가지고 놀고 TV를 보는 것도 전혀 막지 않으셨죠. 덕분에 마릴린 먼로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의상을 입히기도 했고 파비올라 여왕의 결혼식을 보고 웨딩드레스를 만들 수 있었어요. 콘 브라를 처음으로 입힌 것 역시 나나였어요.”



‘살롱’이 디자이너로서 자질을 어떻게 발견했는가에 관한 이야기라면 ‘오디세이’와 ‘스킨 딥’은 디자이너로서 역량을 어떻게 강화했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마치 푸른 바닷속으로 들어온 듯한 ‘오디세이’ 공간엔 그에게 영감을 준 뮤즈와 친구 등 32명의 마네킹이 서 있다. 극단 위비는 3D 프로젝션 기법을 통해 이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얼굴을 직접 녹화한 영상과 목소리를 입혀 한 사람씩 관람객에게 말을 건네듯 이야기하고 노래 부르도록 만든 것이다.



‘스킨 딥’은 붉은 빛이 아스라이 비추는 성인용품점을 통째로 옮겨놓은 듯한 모습으로 꾸몄다. 혈관이 그대로 비치는 듯한 보디슈트나 타투 프린트 등으로 장식한 의상이 놓인 이 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오른쪽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남성의 모습이다. “왜 깃털과 레이스는 여성의 전유물일까?”라고 물으면 “이것은 모두 게임에 불과해. 너는 좀 더 자유롭고 유연해도 돼”라고 답하는 식이다. 왜 남성은 상품화가 되면 안 되는가 혹은 세상에 모든 남자가 치마를 입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치마를 입을 자유는 가질 수 있는 것 아닌가, 라고 물어온 고티에의 오랜 고민을 털어놓는 것이다.

1990년 월드투어 당시 마돈나가 입고 나온 코르셋.



“한국 아이돌과 함께 작업하면 좋을 것 같아” 실제 쇼가 벌어지는 런웨이처럼 꾸며진 회전형 설치물을 기점으로 전시는 후반부로 넘어간다. 프랑스 파리에서 무심한 듯 시크한 패션을 보고 자란 그가 영국 런던의 펑크 문화에서 어떤 영감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섹션이 ‘펑크 캉캉’이라면, ‘어반 정글’은 늘 다른 것을 찾아다니는 그가 중국ㆍ몽골ㆍ스페인ㆍ러시아의 스타일을 어떻게 소화했는지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 정도면 그에게 있어 ‘다름’이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코드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패션에 있어 가장 안타까운 것 중 하나는 여전히 전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에요. 제가 패션에 몸담기 시작했을 때는 스웨덴 출신 금발 미녀가 전형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때도 붉은 머리나 검은 머리, 혹은 진한 피부색을 가진 개성 있는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는데 말이죠. 그래서 저는 전문 모델이 아닌 일반인을 종종 기용합니다. 체형이 큰 경우도 있고, 성별을 바꾸는 경우도 있지만 중요한 건 이 세상에 한 가지 종류의 아름다움만 존재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한국인이 미국인이나 프랑스인을 흉내를 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각각의 매력과 아름다움이 있는데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죠.”



패션 뿐만 아니라 영화ㆍ음악 등에도 관심이 많은 그의 팔색조 같은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공간도 준비돼 있다. 의상 디자이너를 다룬 영화 ‘팔바라스’(1945)를 보고 처음 패션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한 만큼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1989)부터 ‘제 5원소’(1997), ‘나쁜 교육’(2004) 등 영화 의상 작업도 간간이 진행해 왔다.



“저는 작품 활동을 할 때 항상 뮤즈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로 제가 존경하는 분들과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하기 때문에 감독이나 뮤지션들을 많이 믿는 편이에요. 저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주길 기대하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영감을 받아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그의 다음 컬래버 상대는 누가 될까. “한국의 아이돌과 함께 작업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뮤직비디오도 굉장히 신선한 게 많던데 기회가 된다면 콘서트를 한 번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도 굉장히 위트 있으면서도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는 힘이 있어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 낸 것 같아요.”



이번 서울 전시를 위해 2NE1의 씨엘과 빅뱅의 지드래곤을 본딴 마네킹(왼쪽 사진)을 특별 제작해 런웨이 관객석에 배치했을 정도니 이 같은 그의 바람은 본격적으로 기대해봐도 좋을 성 싶다. ●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a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ㆍ서울디자인재단ㆍ현대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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