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난 욕망에, 윤동주는 내면에 솔직…그와 난 닮았다"

중앙일보 2016.03.31 01:40 종합 25면 지면보기
기사 이미지

순결의 시인 윤동주 현상에 대해 ‘세속 작가’ 마광수가 입을 열었다. 윤동주 시에 대해 “내면 갈등을 투명하게 드러내 아름답다”고 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요즘 문화계에서 가장 뜨거운 인물은 70년 전 세상을 뜬 시인 윤동주(1917∼45)다.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15만 부 넘게 팔리고, 5억을 들인 저예산 영화 ‘동주’는 114만 명이 관람했다(29일 현재). 관련 출판도 잇따른다. 시 소개 평전 『처럼』, 사진 자료를 강화한 시·산문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나왔다. 월간 문예지 ‘문학사상’ 3월호는 일본법원의 1944년 윤동주 판결문을 구해 실었다. 그가 조선 독립의 야망 실현을 위해 릿쿄(立敎)대에서 도시샤(同志社)대로 학교를 옮겼다는 억지 주장이 나온다.

8월 정년퇴임하는 마광수 교수

늘 회의하며 내면 파헤친 윤동주
그의 저항 대상은 자기자신
과장도 없고 가르치려하지도 않아


왜 지금 윤동주인 걸까. 문학평론가 유성호씨는 “여러 가지로 훼손된 우리 삶의 모습과 정 반대인, 흠 없는 사람을 찾는 현상”이라고 해석했다. 종교적 경건함마저 느끼게 하는 희생 제물 이미지가 작동한다는 얘기다.

연세대 마광수(65) 국문과 교수도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여대생 제자와 성관계를 갖는 대학교수가 나오는 92년 소설 『즐거운 사라』로 구속·해임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국내 윤동주 박사 1호다. 83년 윤동주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땄다. 시 전편을 상징주의 이론으로 분석했다. 윤동주가 상징주의를 배워 활용한 적은 없지만 쉬우면서도 모호해 풍부한 해석의 여지가 있다는 내용이다.

24일 오후 마 교수의 서울 이촌동 자택을 찾았다. 그는 8월이 정년퇴임이다. 아직도 90년대 소설 외설 시비의 상처가 큰 듯 했다. 자꾸 자기 얘기로 돌아갔다. 기관지가 약해져 줄인 게 하루 두 갑이라며 줄담배를 피웠다.
뜻밖이다. 윤동주 1호 박사라니.
“내가 변태 교수로 몰려 억울하게 잡혀가는 바람에 윤동주와 내가 안 맞는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 사람도 솔직했고 나도 솔직했다. 둘 다 글을 아주 쉽게 쓴다. 그리고 나도 시인 아뇨. 소설보다 시로 먼저 등단했잖아.”
솔직하다면.
“사람이 먹는 거 하고 섹스, 둘밖에 더 있어. 나는 인간의 성적인 욕망을 솔직히 고백했다. 그러다 피 봤지. 아무도 안 하는 걸 해봐야겠다 그런 거였거든. 이 사람 역시 성적인 것을 빼고는 자기를 다 드러냈다. 시가 곧 자기 고백이다. ‘참회록’ 같은 시를 봐라. 온통 자기에 대해 분석하고 부끄러워하는 내용이다. 끊임없이 회의와 모색을 하며 자기 내면을 해부한 사람이다. 시에 교훈도 별로 없다. 맑은 동심으로 쉽게 시를 썼다.”
저항 시인의 이미지가 강한데.
“그의 시를 저항시라고 하면 틀린 말이다. 그의 저항 대상은 자기 자신이었다. 일본에 독립운동하러 간 게 아니다. 도항증(渡航證)을 받기 위해 창씨개명까지 하며 문학 공부하러 갔다. 시에 명시적인 저항이 없다. 오히려 내 목을 댈테니 잘라라, 는 식의 마조히스트 색채가 있다. 그만큼 내부 갈등이 많았던 사람이다.”
문학적으로는 어떻게 평가하나.
“당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정지용과 교류했지만 모더니즘 계열이 아니다. 좌파 문학과도 관련 없고 청록파의 자연으로 돌아가자, 도 아니었다. 당시 시인들은 뭘 가르치려 하거나 과장되게 흐느끼거나 아니면 카프처럼 나가 싸우자고 부르짖거나 였다. 윤동주에게는 세 가지가 하나도 없다. 가장 독창적인 시인이다. 시가 일기 같다.”
내성적이었나.
“말도 못하게. 술·담배도 모르고 여자도 몰랐다. 아무리 추적해도 연애한 기록이 없다. 연희전문(연세대 전신) 다닐 때 수업 끝나면 본정통이라고 불렀던 지금의 명동에 가서 책방 순례를 한 다음 카페에서 차 마셨다. 그래서 나는 윤동주가 기적이라고 본다. 그의 작품을 보관했다가 나중에 출판한 정병욱 같은 친구가 없었다면 세상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졌을 거다. 기적이고 축복이다. 그런 윤동주가 부럽다. 나도 곧 죽을 텐데 내 원고를 보관해 줄 사람은 없을 거야, 아마.”
요즘 윤동주 현상은 어떻게 보나.
“사람들이 이제야 시를 볼 줄 알게 된 거다. 그동안 난해하고 철학적인 것만 좋은 건 줄 알았지. 윤동주는 신통하게도 주석 없이도 누구나 알 수 있게 썼다. 윤동주의 그런 점에 끌렸다. 난 난해한 걸 제일 싫어한다. 문학이 결국 소통 아닌가. 역시 영화가 기폭제 역할을 한 것 같다. 또 윤동주에게는 두 가지 장점이 있다. 하나는 일찍 죽었다는 점, 우리에게는 요절한 사람에 대한 이상한 숭배가 있다. 내 제자지만 기형도도 그렇고. 또 하나는 잘 생겼다. 정직하고 깨끗하게 생겼다. 못생기고 뚱뚱했다면 이런 신화나 열광은 없었을 거야.”
곧 정년퇴임인데.
“고난이 많았다. 내가 잡혀간 지 25년이 됐는데 제2의 마광수도 안 나오고 검열은 더 심해졌다. 한국이어서 일어난 일이다. 일본이나 프랑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잡혀간 사람을 동정하기는 커녕 오렌지족의 대부라고 했다. 한국 사람들은 ‘페이머스(famous·유명한)’뿐 아니라 ‘노토리어스(notorious·악명 높은)’도 질투한다. 퇴임하면 수입이 팍 줄 거다. 중간에 8년을 놀아 연금도 얼마 안 된다. 외로운 독거노인이지 뭐.”
후회는 없나.
“많지. 마흔한 살에 잡혀 들어가 40대 10년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변절은 안 했다. 다른 글은 몰라도 적어도 소설과 시로는 성을 파고 들었다. 너무 중요하잖아요.”

그는 최근 산문집 『섭세론(涉世論)』을 출간했다. 거친 세파를 헤쳐 나가는 데 필요한 경구를 모은 책이다. 인생은 본질적으로 허무한 것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성적 쾌락 추구로 달래야 한다는 튀는 주장을 담았다.

집필 계획을 묻자 “『인간에 대하여』라는 또 다른 산문집도 곧 내고 누가 웹소설 써보라고 해서 곧 연재 를 시작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독창적인 예술작품이 나올 수 없다. 개인들도 공포를 느끼며 살 정도니….”
 
♦ 마광수=1951년 서울 출생. 77년 박두진 추천으로 시인 등단. 산문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냈다. 92년 소설 『즐거운 사라』로 구속(음란물 제작 및 배포 혐의) 된데 이어 95년 연세대 교수 직에서 해임되며 표현의 자유 논란을 불렀다. 98년 복직됐으나 2000년 논문실적 부실 판정을 받고 휴직했다가 2003년 다시 강단에 섰다.

글=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