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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분식회계와 추정오류

중앙일보 2016.03.31 01:15 종합 30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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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논설위원

대우조선해양의 회계장부는 분식인가 아닌가. 지난주 회계업계는 이 주제를 놓고 뜨거웠다. 2013·2014년 각각 4000억 넘는 흑자를 냈던 대우조선은 1년 뒤인 2015년 5조원 넘는 손실을 냈다. 구멍가게도 이런 요지경 장부는 쓰지 않는다. 업계에선 ‘회계절벽’이라 했다. 급기야 회계장부 감사를 맡은 안진 측이 지난주 뒤늦게 고해성사를 했다. “2013·2014년 대우조선의 장부는 잘못됐다. 흑자가 아니라 사실은 손실이 났다. 회계장부를 고쳐야 한다.”

업계가 발칵 뒤집혔다. 투자자들은 분노했다. 회계장부는 회사의 성적표다. 공부 좀 하는 줄 알고 투자했다가 손실을 키웠다며 당장 소송을 냈다. 대우조선 측이 강력히 반대했고, 회사 내부에서도 “긁어 부스럼”이라며 만류하는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2015년 5조5000억원 손실이 사실은 2013, 2014년에 먼저 2조원이 났다는 것이니 대우조선의 손실 총액도 바뀌는 게 없다. 안진 관계자는 “(틀린 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장부를 놔둘 수는 없었다”고 했다.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4000억원을 벌던 회사가 1년 만에 5조원 넘게 까먹은 속사정은 뭔가. 회계법인은 왜 2년이나 가만있었을까. 왜 지금 와서 굳이 회계장부를 고친 걸까. 어떻게 조 단위로 차이가 날까. 책임은 누가 지나. 책임지는 사람이 있기는 한가….

대우조선이 망가진 2013~2015년에 있었던 일은 크게 보면 이런 것들이다. 먼저 외부 요인. 세계 경제가 불황에 빠져 유가가 급락했다. 조선업계도 동반 불황에 빠졌다. 수주 경쟁이 치열했다. 세계 1~3위인 한국 업체들이 특히 심했다. 저가 수주, 마이너스 수주를 남발했다. 해양플랜트 사업에 차례로 뛰어들었다. 차세대 먹거리는 맞지만 위험이 크고 수익이 불확실한 사업이었다. 현대·삼성중공업이 수조원씩 깨먹었다. 그걸 보면서도 대우조선은 뒤따라갔다. 내부 요인도 있다. 낙하산 사장은 연임에만 목을 맸다. 그러다 지난해 교체됐다. 신임 사장은 빅배스(Big Bath)를 했다. 쌓인 부실을 전임 사장의 몫으로 샅샅이 털어버리는 회계 수법이다. 적폐 청소가 주목적이지만 다른 이득도 있다. 그래야 후임이 과거의 부실에서 자유로워진다. 미래의 실적과 성공을 오로지 자기 몫으로 할 수 있다.

나는 이번 회계장부 사태가 이 모든 것들의 합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안진의 죄는 되레 가볍다. 분식회계는 처벌받지만 ‘추정 오류’는 처벌 받지 않는다. 둘 사이를 가르는 기준은 하나다. 알고 했느냐 몰랐느냐. 알면서 했다면 형사처벌도 각오해야 한다. 몰랐다면 면죄부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알고도 놔둔다면 사기죄로 대표이사까지 처벌받을 수 있다. 안진의 뒷북 고백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안진도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손실을 한 박자 늦게 찾아낸 것은 전문가답지 않았다. 그 바람에 대우조선은 해양플랜트를 더 수주했고 손실을 더 키웠다. “회사 측이 제대로 자료를 주지 않았다”는 건 맞더라도 핑계다. 회사가 자료를 거부했다면 감사 보고서에 ‘의견거절’이나 ‘한정’으로 적었어야 한다. 아니면 최소한 ‘대규모 손실 위험이 있다’고 각주에라도 남겼어야 한다. 안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물론 회계장부의 일차 책임은 작성자인 회사에 있다. 요지경 장부를 작성한 대우조선의 죄가 훨씬 무겁다. 낙하산 사장 때문인지, 상황이 진짜 어쩔 수 없었는지 하루 빨리 밝혀야 한다.

이번 건을 취재하면서 제일 많이 들은 얘기가 “감독 당국과 검찰이 어련히 알아서 감리·수사까지 할 텐데 왜 언론이 나서서 부추기느냐”였다. 과연 그런가. 근 30년 신문사 밥을 먹으면서 나는 미루면 안 되는 일과 미뤄도 되는 일을 이제 조금은 구별하게 됐는데, 이번 건은 명백히 전자다. 벌써 감독 당국의 봐주기 밀약설이 돌고 “정권 바뀐 뒤에나 책임자 문책이 이뤄질 것”이란 관측이 파다하다. 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늦어질수록 제2, 제3의 대우조선이 속속 등장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엔 이미 또 하나의 대우조선이 자라나고 있는지 모른다.

이정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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