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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노사가 방조하는 고용세습

중앙일보 2016.03.29 00:55 종합 29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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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자연 및 인위적인 감원으로 결원이 생겼을 때 조합이 추천하는 자를 우선 채용할 수 있다.’ ‘정년퇴직자의 요청이 있을 시 그 직계가족을 우선 채용함을 원칙으로 한다.’

어느 대기업의 단체협약에 들어 있는 조항이다. 이른바 ‘세습고용’을 명문화했다. 고용노동부가 100인 이상 노조가 있는 사업장 2769개소를 조사해 찾아냈다. 무려 25%가 이런 식의 우선·특별채용 규정을 단협에 끼워놓고 있었다. 대기업일수록 많다.

대를 이어 근무하자면 인사경영권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일까. ‘직원 채용이나 승진, 승급, 휴직, 전직, 전보, 배치전환, 징계와 같은 인사행위를 할 때는 노조와 사전 합의한다’고 못박아 놓은 곳이 368개사에 달했다. 노조가 찬성하지 않으면 회사가 인사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항이다. 심지어 하도급을 줄 때 반드시 노조의 동의를 거치도록 한 곳도 4개 중 한 곳꼴이다. 하청업체에 일자리를 뺏기는 걸 사전 차단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힘있는 노조의 기득권 지키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른 노조가 발을 못 붙이도록 싹을 자르려 한 곳도 수두룩했다. ‘회사가 다른 노조와는 교섭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통해서다. 복수노조가 생기더라도 무시하라는 얘기다. 노조 스스로 헌법이 보장한 노동권을 제약하는 천동설(天動說)적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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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노조의 자주성을 포기한 듯한 조항도 있다. 노조 사무실 유지관리비와 차량, 노조 전임자 출장비 같은 것을 회사가 대라는 거다. 외국의 노조는 “회사에 종속된 단체가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회사의 지원을 받는가. 그건 부당 노동행위”라며 펄쩍 뛴다. 이런 일이 한국에선 정당한 권리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이기권 고용부 장관은 “위법·불합리한 규정을 고치는 것은 작은 부분이지만 근로자나 청년에게 돌아오는 효과는 매우 크다”고 말했다. 단협만 바로잡아도 고용시장의 문을 활짝 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고용부는 뭘 했을까. 지난해에도 위법한 단협을 바로잡겠다고 공언했다. 그런데도 나아진 게 없다. 노조뿐 아니라 사용자도 개선할 의지가 없어서다. 고용부의 시정명령을 무시하고 사법처리를 받더라도 형량은 고작 벌금 500만원이다. 단협을 고치려 노조와 갈등이 깊어져 파업이라도 벌어지면 생산차질과 노동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회사로선 ‘차라리 벌금을 감수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갖게 하고, 노조로선 이런 사용자의 태도를 십분 활용할 수 있도록 법이 무르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엄포만으로 바뀔 가능성은 없다. 정부의 다음 행보가 궁금한 이유다.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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