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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 York Times] 반기문 진실했지만 유엔은 죽어가고 있다

중앙일보 2016.03.29 00:55 종합 29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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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밴버리
전 유엔 사무차장보

인생의 30년을 유엔과 함께 보냈다. 인도양 쓰나미와 아이티 지진, 시리아 내전과 서아프리카 에볼라 바이러스 사태까지 수많은 일을 했다. 나는 유엔이 수호하는 원칙들을 강력히 지지한다. 내가 유엔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유엔은 세계가 직면한 온갖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차별화된 기구다. 하지만 워낙 광범위한 규모로 잘못된 조직 관리 탓에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6년 전 나는 사무차장보에 임명돼 뉴욕 본부로 갔다. 조지 오웰의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훈계, 루이스 캐럴의 소설에서나 등장할 무논리가 유엔을 지배할 줄은 몰랐다. 유엔의 관료제는 사악한 천재 여러 명을 장기 구금한 끝에 짜낸 아이디어가 아닌가 할 만큼 복잡하기 그지없다. 가입국들로부터 거둬들인 어마어마한 분담금을 빨아들여 흔적도 없게 만드는 블랙홀이다.

가장 큰 문제는 꽉 막힌 인사 제도다. 유엔은 최고의 인재를 뽑아 현장에 신속히 배치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론 직원 1명을 뽑는 데 평균 213일이나 걸린다. 올 초부터 그 절차는 더욱 복잡해져 채용기간이 1년을 넘기게 됐다. 경악할 따름이다.

에볼라 사태 당시 현장에 있던 나는 전문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하지만 수단 남부에서 근무 중인 전문 직원 단 1명을 가나의 아크라 본부로 이동시키는 데 수 주일이나 걸렸다. 의료진 통과 허가증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에볼라 확산을 막기 위해 인류학자가 필요했다. 현지인들의 위험한 매장 방식 때문에 에볼라 발병 건수가 50%나 급증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매장 방식을 바꾸도록 설득하려면 그들의 전통과 문화를 잘 아는 인류학자의 도움이 절실했다. 하지만 유엔 규정에 따르면 인류학자를 고용할 방법은 없었다. 나는 결국 규정을 위반해 여성 인류학자를 고용했다. 그는 큰 도움이 돼 주었다. 하지만 내가 현장을 떠나자마자 유엔은 인류학자와의 계약을 종료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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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유지는 예산만 수십억 달러씩 들어가는 대형 프로젝트다. 이 임무를 맡은 유엔 직원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어마어마한 책임을 진다. 하지만 인사이동 권한조차 없다. 한 나라의 생사를 결정하는 임무보다 인사결정권을 더 중히 여긴다는 건 유엔의 관료제가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 잘 보여준다.

유엔의 평화유지 지휘관 가운데 명백히 무능한 참모관이 1명 있다. 하지만 중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한 유엔이 그를 해고하는 건 불가능하다. 지난 6년간 현장에 파견된 직원 가운데 해고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성과 미달로 제재받은 사람도 없다.

두 번째 심각한 문제는 유엔의 결정이 정치적 편의에 따라 내려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평화유지군은 명확한 철수계획 없이 미적대는 경우가 많다. 1990년대 초 내가 근무했던 캄보디아에선 2년도 되지 않아 평화유지군이 철수했다. 그러나 지금은 평화유지군이 10년 내에 철수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아이티는 10년 넘게 무력분쟁이 없었는데도 4500명 넘는 유엔군이 주둔해 있다. 그럼에도 안정된 민주제도 구축이란 유엔의 핵심 임무는 달성하지 못했다.

가장 안타까운 사례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이다. 유엔은 2년 전 이 나라의 평화 유지 임무를 넘겨받았을 때 어느 나라 군대의 도움을 받을지 선택할 수 있었다. 한데 유엔은 적절한 논의도 하지 않고 콩고민주공화국과 콩고의 군대를 평화유지군으로 택했다. 두 나라 군대가 심각한 인권유린을 저질러왔다는 보고가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중앙아프리카에 들어간 두 나라 군대는 소녀가 대부분인 현지 주민들을 지속적으로 강간·학대해왔다. 유엔이 지켜주려던 바로 그 사람들의 인권이 유엔 평화유지군에 의해 유린돼 온 것이다.

지난해 콩고 평화유지군은 법적 근거도 없이 주민 여러 명을 체포하고 심하게 구타했다. 그 결과 2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유엔 본부의 관리들은 비난 한마디 하지 않고 일을 덮었다. 현지 주민들은 평화유지군을 추방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묵살됐다. 아동 강간 사례까지 드러났다. 결국 지난달에야 유엔은 콩고민주공화국이 파견한 평화유지군을 쫓아냈다. 그러나 콩고가 보낸 평화유지군은 여전히 남아 있다.

유엔 고위 관료가 ‘편의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범죄를 묵인하는 충격적인 모습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올해 우리는 새 사무총장 선거를 앞두고 있다. 유엔이 평화와 인권의 수호자란 지위를 지키고 싶다면 진정으로 개혁에 정진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개혁은 독립된 외부 패널이 인사제도를 확 뜯어고치도록 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모든 행정비용에 상한선을 정하고 예산 배분권을 외부 인사에게 넘겨 이들이 사무총장에 직보하는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엄격한 감사제도 도입도 필수다.

반기문 사무총장은 진실된 인격자다. 그러나 유엔에는 도덕적 자질과 전문적인 역량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너무 많다. 옳은 일을 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이 유엔을 이끌도록 해야 한다.

앤서니 밴버리 전 유엔 사무차장보

◆원문은 중앙일보 전재계약 뉴욕타임스 신디케이트 19일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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