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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라의 아이슬란드 오디세이] ⑨ 여명이 만들어 낸 황홀한 아침

중앙일보 2016.03.28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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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3분의 1을 돌았다. 여행의 3분의 1이 지난 셈이다. 그리운 것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중 나를 가장 애타게 한 것은 해의 부재였다. 겨울 아이슬란드는 해를 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여름철 아이슬란드의 태양은 밤이 되어도 지평선 아래로 내려갈 줄을 몰랐다. 백야(白夜), 밤은 와도 어둠은 오지 않는 시간은 여름 내내 이어졌다.

그런데 겨울이 되면 사정은 180도 달라졌다. 해만큼 귀한 것이 없었다.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해가 떠 있는 동안에도 틈만 나면 먹구름이 끼고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해가 아예 뜨지 않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음울하고 변덕이 심한 날씨는 아이슬란드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어둡고 우울하다 못해 고독까지 느껴지는 아이슬란드의 풍경을 감상하는 것은 분명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음산해지는 것이 문제였다. 식물에게 광합성이 생존의 필수조건이듯, 사람에게도 어느 정도의 볕은 반드시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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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도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따라 몸도 마음도 축 늘어졌다. 여느 때와 같이 밤은 성급하게 찾아왔고 부랴부랴 숙소를 잡은 마을로 향했다. 홀마빅(Holmavik)이라 불리는 작은 어촌마을이었는데 다른 마을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예약해둔 방은 침대 4개가 있는 도미토리였다. 묵는 사람은 건물을 통틀어 나 혼자였다. 주인도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는 말만 남기고 집으로 가버렸다. 욕실로 가서 밀린 빨래와 샤워를 했다. 지하에 있는 부엌에서 대충 밥을 해먹고 방으로 올라와 침대에 누웠다. 방에는 아주 큰 창이 있었는데 밖은 온통 깜깜한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로등 하나라도 켜져 있었다면 덜 쓸쓸했을 텐데’라고 생각하다 더 쓸쓸하게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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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뿐이던 창문에는 온전히 다른 광경이 채워져 있었다. 홀마빅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순간 커다란 호수로 착각할 만큼 잔잔했다. 물결의 일렁임을 보니 바람이 아주 부드럽게 불고 있는 것 같았다. 하늘도 간밤에 물로 닦아 놓은 것처럼 청명했다. 저 멀리 바다와 산과 하늘이 만나는 곳부터 산호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비너스의 띠, 즉 해가 뜨기 직전이라는 대기의 신호였다. 창문을 통해 볼 경치가 아니었다. 잠옷 위에 대충 점퍼를 걸친 뒤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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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앞 아무렇게나 자란 잡초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코끝으로 느껴지는 바람결이 차가우면서도 상쾌했다. 푸른 바다 위로 황금색 여명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광경에 어제의 무거웠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평범하게만 보였던 풍경이 형형색색의 빛을 만나니 한폭의 수채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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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은 고요했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면 새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물 위에 음표를 그리는 소리와 오리가 물장구치는 소리가 들렸다. 태양의 온기에 공기가 서서히 데워졌다. 얼마 만에 느끼는 따뜻한 햇살인가. 잠옷 바람인 것도 잊은 채 언제 또 올지 모를 황홀한 아침을 한참 동안 온몸으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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