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박정호의 사람 풍경] 나눠 먹는 빵이 제일 맛있죠, 매달 3000만원어치 나눠줘요

중앙일보 2016.03.26 01:15 종합 14면 지면보기
기사 이미지

임영진 대표는 빵집 외길을 걸어왔다. “마케팅을 전공하지도, 경영대학원을 나오지도 않았지만 기업은 돈만 버는 곳이 아니라는 걸, 세상에 좋은 일을 전파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현재 대전에서 빵집 3곳을 꾸려가고 있다. 신제품 개발에도 관심이 커 매일 400종의 빵을 빚어내고 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빵장수’ 임영진(62)씨가 슬리퍼 모양의 도톰한 빵을 둘로 쫙 나눴다.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가 빵 한쪽을 뚝 뜯어 줬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다. 이탈리아 식빵 치아바타(ciabatta)다. 2014년 여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했을 때 임씨가 주한 교황청 대사관에 보냈던 그 빵이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빵이죠. 달지 않아서 질리지 않아요. 빵 중에 가장 맛있는 게 뭔지 아세요. 바로 나눠 먹는 빵입니다.”

60주년 맞은 대전 빵집 ‘성심당’ 임영진 대표


임씨는 올해 ‘환갑’을 맞은 대전시 빵집 성심당 대표다. 1956년 부친 임길순씨가 대전역 앞에 천막을 치고 찐빵을 팔기 시작한 지 어느덧 60년이 됐다. 경쟁과 부침이 심한 제빵업계의 장수기업으로 소문이 났다. 그를 만난 건 지난 21일 오후. 임 대표가 대전시와 양해각서(MOU)를 맺고 온 직후였다.
 
기사 이미지

1956년 대전역에서 시작한 성심당. 68년 대전시 은행동 153번지에 마련한 빵집 건물.

 
시와 빵집도 MOU를 맺나.
“대전을 알리는 데 뜻을 함께했다. 시 측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관(官)이, 공무원이 빵집을 이처럼 대했겠나. 흐뭇하다.”
대전의 대표 브랜드가 됐다는 증거다.
“60년을 맞았다는 게 기적 같다. 그만둘까 하는 위기도 몇 번 있었다. 손가락질 받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게 믿기지 않는다.”
빵 냄새가 지겨울 것 같은데.
“맞다. 아무리 좋은 냄새도 배고플 때 잠깐 맡아야 향기롭다. 하지만 빵은 제 천직이다. 한눈을 판 적이 없다. 더도 덜도 아닌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 생계 자체였다.”
 
기사 이미지

2013년 대전시 은행동 153번지에 새롭게 단장한 케이크 전문점. 본점 빵집은 그 옆에 있다.


음식장사의 생명은 신뢰다. 먹는 걸로 장난치면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없다. 임 대표도 있는 그대로 속을 내보였다. 한길을 지켜 온 장인정신이 느껴졌다. 빵도 빵이지만 성심당이 유명해진 건 독특한 기부문화 덕분이다. 창립 이후 지금껏 매일 팔다 남은 빵을 고아원·양로원 등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 주고 있다. 하루라도 지난 빵은 팔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 왔다.
 
어느 정도 빵을 나눠 주나.
“매일 다르다. 매달 평균 3000만원어치 정도 된다. 97년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을 잇고 있다. ‘생색내는 거 아니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남는 빵을 세일해 파는 곳이 얼마나 많은가.”
부친 고향이 함경도 함주인데.
“1·4 후퇴 때 흥남부두에서 남쪽으로 가는 마지막 배를 타셨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오셨다. ‘살아남는다면 평생 남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하셨다고 한다. 그 약속대로 살다 가셨다.”
북한에서도 빵을 만드셨나.
“과수원을 하셨다. 미군 구호물자로 받은 양가루(밀가루)로 찐빵을 만들어 판 분은 어머니셨다. 아버지는 남을 돕는 ‘좋은 일’만 하고 다니셨다. 가족들의 불만이 컸다.”
집안도 넉넉하지 않았을 텐데.
“아버지께선 무지할 만큼 단순하셨고 고집이 세셨다. 설탕·밀가루 값으로 대전역 앞이나 다리 밑에서 굶주리는 이들을 도와주셨다. 오죽하면 어머니께서 ‘천당에는 아버지나 가실 것’이라고 하셨을까.(웃음)”
 
본인도 아버지 못지않다.
“대학 때부터 집안일을 거들었다. 아버지께선 ‘주는 게 받는 것’이라고 믿으셨다. 60주년 기념 표어가 ‘밀가루 두 포대의 기적, 대전의 문화가 되다’이다. 돈만 보고 왔다면 오늘의 성심당은 없었을 것이다. ‘나누는 기업이 성공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말이다.”
가장 큰 위기가 있었다면.
“2005년 빵집 3층에서 큰불이 났다. 제빵기계를 못쓰게 됐다. 화재 원인을 놓고 송사에도 휘말렸다. 그때 직원들이 나섰다. 알아서 청소를 하고 중고 기계도 사들였다. 수습에 한 달 넘게 걸릴 것으로 예상했는데 일주일 만에 다시 빵을 빚어냈다. 감동적이었다.”
 
또 다른 난관은 없었나.
“가족 문제인데 밝혀도 될까. 지금은 세상을 뜬 남동생 때문에 속앓이를 했다. 제가 극구 말렸지만 95년 무렵 대전·충남 지역에 프랜차이즈를 24개나 만들었다. 준비 부족으로 결국 실패로 끝났다. 한번 금 간 신뢰를 되찾는 게 쉽지 않았다.”
 
87년 민주항쟁 때 일화도 유명하다.
“빵집 앞에서 시위가 잇따랐다. 기껏 만들어 놓은 빵을 팔 수 없었다. 대학생들에게 빵과 물을 몰래 줬는데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으로 걸렸다. 검찰에 불려 갔고 위생 단속도 받았다. 문 닫을 직전까지 갔다. ‘이래서 이민을 가는 구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전경에게도 빵을 준 게 알려지고 6·29 선언이 나오면서 무혐의로 풀려나게 됐다.”
 
기사 이미지

성심당의 사훈.


임 대표는 지난 3일 제50회 납세자의 날에 산업포장을 받았다. 5년 전에도 아름다운 납세자상을 수상했다. 교황청이 평신도에게 주는 최고 훈장인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기사 훈장’도 지난해 받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나라당 비대위원장이었던 2012년 ‘감동인물’의 한 명으로 그를 찾아오기도 했다.
 
기업들은 흔히 세금을 줄이려 한다.
“투명한 게 되레 쉽고 편하다. 회사가 깨끗하면 정부 지원도 많이 받을 수 있다. 비자금이 왜 필요하나. 또 이중장부는 왜 만들어야 하나. 떳떳하게 경영해야 직원도 믿고 따른다. 또 세금을 내야 국가가 복지제도를 탄탄하게 할 게 아닌가. 돈을 버는 것보다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게 더 즐겁다.”
1년 매출은 어느 정도 되나.
“지난해 400억원을 기록했다. 고객은 평일 1만 명, 주말 2만 명가량이다. 직원은 400명 가까이 된다. 우리는 고과제도가 독특하다. 승진 기준의 40%가 선행이다. 매주 사내신문에 직원들의 미담이 실린다. 빵 레시피(제조법)는 금세 익힐 수 있지만 서로 사랑하는 기업문화는 쉽게 쌓이지 않는다.”
분기별로 상여금을 준다고 들었다.
“3개월마다 순익의 15%를 인센티브로 지급한다. 2001년 법인으로 전환하면서 저도 월급을 받고 있다. 매달 1000만원이다. 필요한 경비는 법인카드를 쓴다. 또 거래처에 100% 현금을 지불한다. 세상의 모든 기업은 동등한 관계다. 갑을관계가 아니다. 갑질을 할 이유가 없다. 중국에서도 매해 200~400명씩 벤치마킹하러 온다.”
튀긴 소보로빵·부추빵이 인기다.
“성심당의 얼굴이다. 각각 특허를 받았다. 여기저기 프랜차이즈를 요청하는 곳이 많은데 절대 대전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연내 생산공장을 한 곳 늘릴 계획이다. 첨단 설비를 알아보려고 올해에만 외국 제빵박람회에 네 차례 다녀왔다.”
맛있는 빵의 조건이 있을까.
“냄비밥도 바로 먹을 때 맛있다. 개떡도 금방 찐 게 가장 맛있다. 빵도 마찬가지다. 신선함이 생명이다. 그 다음이 재료다. 그리고 손맛이다. 칼로 썬 반죽보다 손으로 떼낸 반죽이 더 부드럽다. 인공지능(AI) 디지털 시대에도 손맛은 살아남지 않을까 싶다.”
빵의 매력을 하나 꼽는다면.
“모양과 색깔, 맛이 매일 다르다는 점이다. 일종의 창조다. 비슷해 보여도 똑같은 게 하나도 없다. 지금은 모양만 보고도 맛을 알아맞힐 정도다. 사람만 관상을 보는 게 아니다. 그래도 아직 빵보다 밥이 좋다.(웃음)”
정치인들이 종종 찾아오는데.
“손학규씨도, 김무성씨도 다녀갔다. 저는 정치를 모른다. 다만 세금 낼 맛이 나는 세상, 분배가 고른 나라를 만들어 줬으면 한다. 유권자도 정치인을 사랑해야 한다. 정치인도 사람이다. 그들도 사랑을 많이 받아야 살기 편한 나라를 만들 것이다. 나 같은 빵장수가 좋은 일을 해 봐야 얼마나 할 수 있겠나.”
 
 ‘공유경제’ 주창한 루빅의 편지 구절을 사훈 삼아
 
기사 이미지

키아라 루빅(左), 루이지노 브루니(右)

임영진 대표는 한국전쟁 종전 이듬해 태어났다. 배고팠던 시절을 직접 보며 자랐다. ‘나눔과 사랑’이라는 그의 가치관은 당시 어려웠던 사회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임 대표는 이탈리아 키아라 루빅(1920~2008)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목격했던 루빅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생활에 옮기는 ‘포콜라레(Focolare·벽난로) 운동’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임 대표는 사랑과 일치를 내세우는 루빅의 ‘공유경제’를 기업 운영의 기둥으로 삼았다. 성심당 곳곳에 붙어 있는 사훈 ‘모든 사람이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로마서 12장 17절)도 루빅이 보내온 편지에 있는 구절이다.

“전쟁으로 꿈도 희망도 사라진, 아무것도 남지 않은 허무의 시대에도 사랑은 남습니다. 루빅은 성경의 말씀은 실행해야 그 뜻이 살아난다고 믿었죠. 천주교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가 1984년 대전 대흥동성당 신부로 오셨을 때 루빅에 대해 처음 알게 됐습니다. 2000년 필리핀에서 열린 포콜라레 사회학교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공유경제에 대해 눈을 떴고요.”

루빅은 91년 브라질 상파울루 빈민가를 보고 공유경제를 주창했다. 빈부격차 해소를 호소했다. 기업-종업원-고객의 상생을 추구했다. 임 대표는 공유경제 전문가인 이탈리아 경제학자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를 한국에 초청하는 작업에도 참여했다. 브루니 교수는 오는 5월 20일 국회도서관에서 ‘(한국) 사회통합을 위한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강연한다. 이튿날 대전도 방문한다. 그의 공저 『21세기 시민경제학의 탄생』이 지난해 국내에 번역됐다.

글=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