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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으로] “일에 회의감 들어 무력감” 입사 6~9년 과장급 63%가 경험

중앙일보 2016.03.26 00:55 종합 17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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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영어교육 업체에 다니는 4년 차 직장인 김진형(31)씨는 올해 들어 업무 마감 기한을 어기는 일이 눈에 띄게 늘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결재 서류를 두고도 시작할 엄두가 안 나 시간만 보내다 막판에 벼락치기 하기 일쑤다. 회의에서도 ‘얘기를 하면 뭐하나’ 하는 생각에 입을 닫는다. 지난해만 해도 뛰어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에이스’라고 불렸던 그였다. 하지만 어느새 동료들 사이에선 ‘게으르고 나태한 직원’으로 낙인찍혔다. 김씨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만 이상하게 의욕이 금세 사라져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털어놨다.

늘어나는 ‘직장인 무기력 증후군’
“성공한 사람이 쉽게 무기력해져”
‘워커홀릭’일수록 더 자주 빠져


대기업 해외영업부에서 일하는 이모(36·여)씨도 비슷한 경우다. 그는 지난달 신제품의 해외 론칭을 앞두고 두 달 동안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주말도 없이 야근을 반복해 일한 결과 프로젝트는 무사히 끝났다. 하지만 위장 장애에 불면증, 신경성 탈모까지 얻은 이씨는 이후 심한 무력감에 휩싸였다. 새 프로젝트를 맡을 엄두가 안 나 동료에게 미루기도 했고 친구들과의 모임도 모두 취소했다. 결국 병원을 찾은 이씨는 “무얼 위해 몸 상해 가며 일하는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면서 열정이 사라진 것 같다”고 토로했다.

최근 심각한 무기력증을 호소하는 직장인이 늘고 있다. 이 때문에 몇몇 병원과 심리상담소에선 ‘직장인 무기력 증후군’을 위한 진단·치료 프로그램까지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직장인 무기력 증후군(worker-lethargy syndrome)은 정식 병명은 아니지만 비슷한 증상으로 찾아오는 직장인들이 급격히 늘면서 병원과 상담소 등에서 쓰기 시작한 용어다.

뇌인지과학자인 박경숙 인코칭 소장은 “현대 사회 직장 내 스트레스가 심해지면서 무기력증으로 상담받는 직장인이 매년 20%가량 증가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무력감·피로감·회의감 등의 증세는 일반 무기력증과 얼핏 비슷하지만 속사정은 전혀 다르다.

김병수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사회생활을 제대로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무기력을 호소하는 직장인들은 증상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원인이 직장 내 업무나 직급·동료 관계 등에 있다”고 설명했다.

직장인이 무기력증에 빠질 위험이 가장 높은 시기는 입사한 지 6~9년 되는 과장급 연차 때다. 지난해 말 복지서비스 기업 이지웰페어가 직장인 101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최근 1년 내 무기력증을 경험한 적이 있다”는 응답이 절반 넘는 58.9%였다. 특히 직급별로는 과장급이 63%로 가장 많았고 차장·부장급(54%), 사원급(48%) 순이었다.

과장급 직장인들은 무기력의 원인으로 ‘일에 대한 회의감’(49%)을 가장 먼저 꼽았다. 그동안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건강만 나빠지는 등 본인에게 남는 게 없다는 생각에서다. 식품업체 직원 박상규(39)씨는 “회사를 위해 가족·건강·여가도 다 포기하고 일했는데 문득 돌아보니 허무하단 생각이 들 때면 동기부여가 안 된다”고 말했다.

과장급부터 성과 평가가 더 엄격하고 경쟁이 치열해진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1등이 아니면 낙오된다는 압박감 때문에 오히려 좌절과 포기가 쉽게 일어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연차와 관계없이 이른바 ‘워커홀릭’이 더 자주 무기력증에 빠지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강도형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조직에서 성공한 사람일수록 한 번 실패했을 때 좌절감이 더 크기 때문에 ‘번아웃(burnout·다 타버린 연료처럼 무기력해진 상태)’에 이르기 쉽다”고 말했다.

신입 등 낮은 연차의 직장인은 노력한 결과물에 대해 반복해서 거절당하거나 지적받을 때 무력감에 빠지기 쉽다. 업무 자체를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이라고 인식하게 되면서 아예 시도할 의욕조차 잃는 것이다. 박경숙 소장은 “사회 초년생들이 반복적으로 좌절을 경험하게 되면 심리학에서 말하는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 상태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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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연차의 직장인은 상대적으로 감정을 솔직하게 표출하기 어렵다는 점도 무기력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꼽힌다. 무기력증은 불안·우울·분노 등의 감정을 숨기는 일이 반복되면서 감정 자체가 고갈돼 발생할 수 있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무기력증의 대표 증상 중 하나가 무감정 상태”라며 “서비스업뿐 아니라 사무직이나 전문직 직장인도 상사·동료에게 감정을 표현하지 못해 감정 고갈형 무기력에 빠진다”고 설명했다.

무기력 증후군을 벗어나기 위해선 작은 것에서부터 동기를 찾는 연습을 하는 게 좋다. ▶30분 일찍 업무 시작하기 ▶할 일을 수첩에 정리하기 ▶마감시간 지키기 등 작은 실천에서 성취감을 느끼고 다음 업무로 넘어가는 방식이다. 김병수 교수는 “한 가지 일에서 성취감을 느끼면 다른 일에서도 의욕이 생긴다”며 “쉬운 것에서부터 일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없애야 한다”고 조언했다.

증상이 심하거나 무기력 상태가 오래 지속될 경우엔 의학적 도움을 받는 게 필요하다. 강도형 교수는 “푹 쉬고 운동을 하는 등 생활 패턴을 개선해도 증상이 계속되면 약물치료를 받는 게 좋다”며 “가벼운 무기력증은 의학적 도움으로 단기간에 회복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학습된 무기력’ 생길 수도

지난해 자신이 운영하는 디자인 관련 학회에서 일하던 제자 A(30)씨를 상습적으로 폭행하고 인분(人糞)까지 먹인 장모(53) 교수의 가혹행위가 공분을 샀다. 그는 결국 재판에 넘겨져 1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당시 A씨가 왜 저항도 못하고 당하기만 했는지도 의문이었다. 일부 범죄심리학자는 3년간이나 학대를 당한 피해자의 심리를 거론하며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란 개념을 사용했다.

학습된 무기력은 1960년대 미국 심리학자 마틴 셀리히만이 개를 그룹별로 나눠 전기충격을 가하는 실험을 하면서 처음 쓴 말이다. 코로 버튼을 누르면 전기충격을 멈출 수 있게 한 그룹의 개들은 이후에도 고통을 피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했다. 반면 버튼을 눌러도 전기충격이 계속 가해진 개들은 종국엔 고통을 감내할 뿐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후 많은 심리학자가 인간에게서도 학습된 무기력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백종우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어릴 적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은 아이가 커서도 반항하지 못한다거나 극심한 경쟁에서 실패를 경험한 아이들이 쉽게 포기하는 경우 등이 무기력을 학습한 사례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글=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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